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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다은 Sep 29. 2024

즉흥적으로 쓴 어느 고통스러운 날의 사유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철학.(블로그에 쓴 것을 옮김)

삶이 고통스러울 때 그 진단과 처방에 탁월한 철학자들은 분과학문으로 심리학이 출현하기 이전부터 탁월한 심리학자였던 19세기 쇼펜하우어와 니체이다.

쇼펜하우어는 내가 만들어낸 표상이 물자체인 의지와 만나 고통스러운 현실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이 모든 삶과 세계의 고통의 원인으로 진단한다. 처방은 이러한 고통을 인식하며 고통을 마주하는 금욕이다. 의지의 부정이다.  금욕고행. 예술을 즐기는 것도 순간적인 마취효과는 있지만 근본적이지는 않다. 소극적인 치료법이다. 쇼펜이 니체보다 더 섬세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다. 그리고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니체는 이러한 쇼펜에게서 약한자들이 재생산하는 허무주의와 데카당스를 발견한다. 시대의 우상앞에 한없 나약해지는 인간. 그걸 예술로 마취하고 고통을 인정하며 금욕하라니. 그러면 더 절망적일 뿐이다. 니체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쾌활했나보다. 의지의 긍정을 제시한다. 예술은 심리적인 것, 심리적인 것은 곧 생리적인 것과 연결되어 생의 의지와 의욕을 고취한다. 예술이 인간 삶의 고행의 길에 아무것도 의욕하지 못하게 하는 마취제나 아편이어서는 안된다. 예술로 삶을 긍정하고 삶의 충만함이 창조되어야 한다.

나는 니체철학으로 아들을 치료했다. 예술을 통해 삶의 충만함과 아름다움, 의지와 의욕을 고취했다. 아들은 음악을 통해 세계를 만나고 자기세계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절망 속을 걷고있는 나는 쇼펜하우어에게 의지하고 있다. 금욕과 의지의 부정. 나의 표상을 만들기를 거부하고 나의 의지가 올라오면 누른다. 개별화의 원리가 이뤄지지 않도록 무념무상무채색으로 살기로 마음먹는다. 내가 무언가 의욕하는 순간 나의 표상이 나를 삼킨다.


 그런데 의지의 부정은 나를 고통 속에서 살게 하지는 않는대신, 생의지를 빼앗는다. 왜 살아야하는가 라는 질문을 마주한다. 니체가 지적한 나약한 인간이 남는다. 그러면 나의 대답은 계속 칸트로 끝난다. 살아야 하니까. 사는게 옳으니까. 그나마 도덕명령을 듣는 선의지만이 남아있다. 선의지에 기대어 생의지의 불꽃이 꺼지지 않게 하는 나.
남은 생도 그 균형 속에서 살것같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의 개별화, 나의 표상까지도 사랑해줄 누군가를 만났으면 좋겠다. 너무 이상적인 바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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