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또 (5)

마지막 편지

by 홍연

수능을 단 일주일 앞둔 어느 오후, 교실은 묘한 긴장과 정적에 잠겨 있었다. 문제집을 풀어내는 볼펜 소리, 뒤적이는 종이 소리, 간혹 교실 창문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커튼을 스치는 바스락거림까지—모든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분필 가루가 아직 공기 속에 흩어져 있었고, 학생들은 대부분 눈 밑에 진한 그늘을 드리운 채 고개를 숙이고 문제집을 보고 있었다. 교실 창문 너머로는 바람에 흔들리는 은행나무가 노랗게 빛났지만, 아무도 그 풍경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단 일주일, 그 사실이 아이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으니까. 칠판 위에 분필로 적힌 공식들은 이미 무의미한 기호처럼 번져 보였다.


그런데 소희의 시선은 문제집 위에서 자꾸만 흐려졌다. 교과서와 문제집 사이에서 그녀의 눈과 생각은 자꾸만 딴 곳으로 흘렀다. 펜을 쥔 손끝은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아까 아침에 받은 편지의 문장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오늘 아침 받은 편지 때문이었다. 책상 서랍 안쪽, 21번 쪽지통에서 꺼낸 그 봉투 속에는 여느때처럼 단정하게 적힌 글이 있었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어. 네가 너무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지막까지 잘 버텨보자”



짧고 단순한 문장이었지만, 그것은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가만히 짚어주는 듯한 온도를 담고 있었다. 그 순간부터 알 수 없는 울림으로 가득 채워져 마음이 들썩였다. 언제나 자신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가장 필요한 말을 건네주는 사람. 이제 더는 단순한 마니또가 아니었다. 편지를 쓴 누군가의 얼굴이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고, 그 얼굴은 자꾸만 같은 반, 창가 쪽에 앉아있는 한 사람과 겹쳐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소희는 결심하듯 펜을 잡았다. 혼란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이 감정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직접 만나야만 했다. 단순히 이름 없는 마니또로 남겨 두기에는, 이미 마음이 너무 많이 기울어 있었다. 그렇게 노트 위로 쓰고 지우기를 수십 번 반복한 끝에 완성해낸 편지는 제법 단도직집적이었다. 짧았지만 그녀의 모든 마음을 담고 있었다.



“우리, 수능 전에 한번 만나자. 그냥 얼굴 보고 싶어.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는지도 궁금하고.”



봉투를 접어 쪽지통에 넣는 순간, 손끝이 떨렸다. 그러나 동시에 묘한 해방감이 따라왔다. 다음날 받은 답장은 간단했다.



“좋아. 만나자.”



딱 두 단어. 그 두 단어가 적힌 그 편지에 소희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가 곧장 요동치듯 뛰어올랐다. 집에 돌아와서도 책상 위에 가방을 던져두고 한참을 발끝으로 바닥을 두드리며 설레어 했다. 이불 위로 쓰러지듯 누워 뒤척이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머릿속은 걷잡을 수 없는 상상으로 가득했다.



‘혹시 진짜 사귀게 되면 어떡하지? 대학 가서도 만나면 좋겠다. 근데 서로 다른 대학이면? 그래도 괜찮을까? 아니면 수능 끝나고 만나자고 해야 할까? 혹시 먼저 고백하면—’



그 모든 생각이 차례차례 몰려와 가슴을 달뜨게 만들었다. 천장을 똑바로 바라보다, 어느 순간 스스로의 상상에 얼굴이 달아올라 베개를 끌어안기도 했다. 머릿속은 이미 수능 이후 시간까지 내달리고 있었고, 그 상상은 소녀다운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채 밤을 끝없이 늘려갔다. 밤늦도록 발끝을 동동 굴리던 소희는 어느 순간 지쳐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마지막 종례가 끝나자 친구들이 평소처럼 같이 가자며 손을 흔들었지만, 소희는 “오늘은 좀 할 일이 있어서…”라며 얼버무렸다. 목소리가 떨리는 걸 들킬까 봐 눈도 마주치지 못한 그녀는 발개진 뺨을 만지작 거리다 빠른 걸음으로 교문 쪽으로 향했다.



교문 앞에는 늦가을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하늘은 유난히 파랬고, 은행잎은 노랗게 물들어 바닥을 덮고 있었다. 소희는 그 길목에 서서 가방끈을 꼭 쥐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발 끝으로 몇번인가 바닥을 후볐다. 처음 10분 동안은 가슴이 기대감으로 터질 듯했다. 한 무리의 학생들이 쏟아져 나올 때마다 애써 쳐다보지 않는 척 멀리 있는 운동장 끝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그가 걸어 나올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운동장 끝에서 달려올 수도 있다. 아니면 복도 창문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나올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20분이 지나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작은 불안이 스며들었다. 그래도 아직은 괜찮았다. ‘아마 담임이 붙잡아 두셨나? 아니면 친구들 때문에 못 나왔나?’ 스스로 이유를 만들어내며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마음속에서 무언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교문을 빠져나가고, 남은 학생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모습이 잔인하게 다가왔다. 그나마 운동장에 남아 있던 아이들도 하나둘 사라졌다.



‘정말 오는 걸까?’



심장이 천천히 식어 내려갔다. 실연과도 같은 허탈감이 그녀를 덮쳤다. 단 한 번도 시작하지 않았던 사랑이 그 자리에서 미리 끝나버린 기분이었다. 끝내 1시간이 넘어갔고 교문 앞에는 거의 아무도 남지 않았다. 경비 아저씨가 무심하게 빗자루를 들고 잎을 쓸고 있었고, 교실 불빛은 하나둘 꺼져 갔다. 그제야 소희는 더는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교문을 등지고 천천히 집을 향해 걸어가며 가방 속에 넣어둔 마지막 편지를 꺼냈다. 마지막 편지만큼은 직접 전해주고 싶은 마음에 실실 웃어가며 글을 쓰고 있었던 지난 날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무언가 마음 한구석에서 툭 끊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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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뚝 멈춰선 그녀는 편지를 잠시 두 손으로 쥐었다. 그러나 곧 이를 악물고 종이를 박박 찢어버렸다. 작은 조각들이 바람에 흩날려 은행잎 위로 떨어졌다. 종이 조각이 노란 잎 사이에 섞여 사라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자 가슴이 허무하게 비어갔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하늘은 여전히 파랗게 높았지만, 그녀에게는 그 빛조차 차갑게만 느껴졌다. 눈 앞에 번져가는 햇살이 더없이 공허했다.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나버린 첫사랑이었다.



그날 저녁, 소희는 책상 앞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손끝은 여전히 뭔가를 붙잡고 싶어 했지만, 이제 붙잡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애가 누구였는지, 왜 나오지 않았는지,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남은 건 찢어진 편지의 조각처럼 흩어진 마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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