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는 듯 아닌 듯
이제 편지는 단순히 ‘익명의 응원’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체온이 묻은 기록이었고, 그 필체 하나가 갑자기 현실의 얼굴들과 이어졌다. 편지를 읽는 내내 소희의 눈은 자꾸만 한 사람에게로 돌아갔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다잡으려 애썼다. “아니야, 아닐 수도 있어. 괜히 혼자 상상하는 거야.” 그렇게 부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에서 작은 불빛처럼 설렘이 번지고 있었다.
“네가 지쳐 있을 때도, 혼자가 아니라는 걸 기억했으면 해.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소희의 눈가가 조금 젖었다. 단순한 위로나 가벼운 격려가 아니라 그녀의 하루를 묘하게 꿰뚫는 말 같았다. 그리고 그 말이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듯했다.
책상 위에 펜을 올려놓으며 소희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기분 좋은 혼란, 그리고 조금은 두려운 설렘. 이름 없는 마니또가 이제는 ‘누군가’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소희는 쉬는 시간이 되자 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에 앉아 있어도 머릿속은 아까 읽은 편지의 글귀로 가득했다. ‘혹시 그 애일까?’ 단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넘기기엔 마음이 자꾸만 기울었다. 몇 걸음만 옮기면 닿는 자리. 그는 창가 쪽에 앉아 펜을 돌리며 무심하게 노트를 뒤적이고 있었다.
“아까 수학 문제 어렵지 않았어?”
소희는 일부러 무심한 척, 지나가듯 말을 던졌다. 너무 특별해 보이지 않게,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작은 파문이 일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잠깐 소희를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응? 글쎄... 그냥 그랬어. 왜?”
짧은 대답, 별다른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마치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소희는 순간, 가슴이 텅 비는 듯했다. 정말 이 애가 아닌 걸까? 대충 '아냐'하곤 얼버무리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러나 다시 자리에 앉아 그의 손끝을 바라보자 또 다른 확신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펜을 쥐는 손의 각도, 공책 귀퉁이에 적힌 작은 낙서들. 그것들은 어쩐지 편지 속 글씨체와 묘하게 닮아 있었다. 그녀는 괜히 목이 말라 물을 한 모금 삼켰다.
수업이 다시 시작되자 그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칠판을 바라보고 있었고, 소희는 옆모습을 힐끔거리며 괜히 혼란스러웠다. 맞는 것 같다가도, 아닌 것 같다.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자꾸만 그를 향해 쏠렸다. 쉬는 시간이 또다시 찾아오면 그는 친구들과 장난을 치며 웃기도 했고, 소희는 그 웃음이 낯설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했다. 그 웃음소리 속에서 편지의 문장이 다시 겹쳐졌다.
“수학 시간에 졸다가 걸리지 마라. 내가 대신 필기해줄 순 없음.”
그 문장을 쓴 사람이 바로 저 웃음을 짓는 사람일까? 아니면, 전혀 다른 자리에서 전혀 다른 표정으로 앉아 있는 누군가일까?
소희는 답을 찾지 못한 채, 그저 애매한 혼란과 묘한 설렘 사이에서 마음을 굴리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책상 위에 올려둔 봉투를 바라보다가 소희는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동안 자신만 상대방의 정체를 짐작하려고 애쓴 줄 알았다. 쉬는 시간마다 그 애를 힐끔거리고 은근히 떠보는 말을 던져도보며, 괜히 친구들에게 묻는 식으로 단서를 찾았다. 하지만 문득 뒤늦게 떠오른 생각이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혹시 그쪽도 똑같이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소희는 순간 숨이 막히듯 가슴께를 눌렀다. 자신이 모르는 만큼 상대도 모르는 것일 텐데. 그런데도 왜인지 편지를 읽을 때마다 마치 자기 마음을 정확히 짚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늘 아침 받은 편지만 해도 그랬다.
“어제 누구한테 혼난 거 아냐? 표정이 좀 안 좋아 보였음. 뭐, 별일 없었으면 됨.”
소희는 그 문장을 읽고 한참이나 편지를 접지 못했다. 분명 자기 얘기 같았기 때문이다. 쉬는 시간에 담임에게 혼나던 모습, 누가 봐도 티가 났을 텐데. 설마 그 애가 본 건 아닐까? 아니면... 단순한 추측이었을 뿐일까? 머릿속은 복잡하게 뒤엉켰다. 내 편지에 무슨 티가 났나? 내가 쓴 글에서 내가 누군지 먼저 알아챈 걸까? 아니면, 그저 우연히 겹친 것뿐일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만약 정말 그 애가 내 정체를 눈치챘다면, 지금 내 곁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는 모습은 뭐지? 내가 떠봤을 때 전혀 모르는 것 같았는데….’ 그렇게 의심과 혼란이 동시에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결국 소희는 편지를 다시 꺼내 들고 글씨체 하나하나를 유난히 오래 들여다보았다. 볼펜이 눌린 자국, 획이 조금 기울어진 습관, 글 끝에 붙는 장난스러운 말투. 모두 다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마치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꿰뚫어본 흔적 같았다. 그러니 더 혼란스러웠다.
‘그 애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 애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편지의 글씨가 다시 눈앞에 겹쳤다. 두 세계가 서로 닿을 듯 말 듯 흔들렸다. 그 사이에서 소희의 마음은 묘하게 가볍게 뛰면서도, 깊숙이 불안하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