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또 (6)

동창회에서

by 홍연

소희는 오랜만에 교정을 밟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래된 교실 창문은 여전히 햇빛을 반짝이며 받아내고 있었고 운동장 모래는 세월 속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질감을 품고 있었다. 그 안에서 그녀의 시선은 자꾸 교문 쪽으로 끌렸다. 오래전 그날도 저 앞에서 오래 서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가슴이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왜 그는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물음은 희미하게 고개를 들었지만, 오래된 기억은 이내 다시 고요 속에 가라앉았다.


이제는 눈물이 터질 만큼 아픈 기억도 아니었고 누구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도 아니었다. 다만 ‘그런 일이 내게 있었지’라는 문득의 회상. 오래전에 지나온 풍경을 바라보듯 서늘하게 남아 있는 기억일 뿐이었다.



편지 속 문장들은 여전히 따뜻하게 그녀 곁에 남아 있었다. 시험을 망친 날 위로해주던 말, 아픈 날 책상에 놓여 있던 초콜릿, 혼자라 느끼던 순간 건네받은 작은 메모. 그것들이 없었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날들도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편지를 쓴 사람이 정말 ‘그 애’였을까 하는 의문도 스쳤다.


그땐 확신에 가까웠지만, 시간이 이렇게 지나고 나니 점점 불확실해졌다. 혹시 내가 스스로 만든 착각은 아니었을까? 그 애가 아니라 전혀 다른 누군가였다면? 그렇게 생각하자 오래 품었던 기억조차 빛이 바래고 허공에 흩날리는 듯했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시간이 분명 내게 숨을 돌리게 했고, 위로가 되어주었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이번 동창회에 그 애가 나온다면?’



그런 생각이 순간 소희의 마음을 스쳤다. 그러나 그 다음엔 곧바로 또 다른 생각이 이어졌다. ‘정말 그 애가 내 마니또였을까?’ 한때는 당연하다 여겼던 믿음이, 이제는 오래된 낡은 종이처럼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이면 그 답을 조금쯤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묘한 기대가 그녀의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다음날, 소희는 약속된 동창회 장소 앞에 도착했을 때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낡은 간판과 네온빛이 번쩍이는 식당 입구는 어쩐지 학창 시절의 치킨집이나 분식집을 떠올리게 했다. 문 안쪽에서 이미 떠들썩한 웃음소리와 유리잔 부딪히는 소리가 흘러나왔고 그 소리만으로도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느껴졌다. 입구 앞에서 가볍게 숨을 고르며 휴대폰을 한 번 확인했지만, 별다른 메시지는 없었다. 그녀는 잠시 긴장을 풀듯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어깨를 펴더니, 마침내 문을 밀고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이 그녀를 맞았다. 반가운 얼굴들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며 환영했고, 몇몇은 의자를 밀치고 나와 그녀의 팔을 잡으며 반가움에 웃음을 터뜨렸다. “야, 진짜 오랜만이다!” “너 하나도 안 변했네!”라는 말들이 연달아 쏟아졌다. 순간 그녀는 웃음을 지으며 답했지만, 마음속은 묘한 울림으로 가득했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의 얼굴은 세월을 따라 조금씩 변해 있었지만, 웃는 모양이나 말투 하나하나는 그때 그대로였다.



식당은 이미 북적거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둥근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모여 앉아 소란스럽게 대화를 이어갔고 구석 테이블에서는 벌써 소주잔이 오가며 한창 옛날 이야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소희는 자리를 안내받아 앉았지만,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테이블 저쪽으로 흘렸다. 그리고 그 순간 눈길이 멈췄다.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는 그는 여전히 친구들과 활기차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웃을 때 눈꼬리가 살짝 접히는 모습, 턱선을 따라 내려오는 자연스러운 곡선—어딘가는 변한 듯했지만 동시에 전혀 변하지 않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 순간 소희의 가슴은 이상하게 가벼워졌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무언가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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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며 식사는 무르익었다. 테이블 위에는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김이 피어오르는 냄새가 가득했다. 숟가락과 젓가락이 부딪히는 소리, 누군가가 잔을 채우며 터뜨리는 웃음, 오래된 비밀을 폭로하듯 떠드는 장난스러운 농담이 한순간에 이곳을 과거로 돌려놓았다.



“야, 그때 재호가 서윤이 좋아했었잖아!”


“그게 언제적 얘긴데, 아직도 그 얘기하냐!”



모두들 어깨를 치며 웃음을 터뜨렸고 테이블은 한동안 왁자지껄하게 흔들렸다. 소희도 자연스레 웃음을 터뜨렸지만, 웃음 끝에서 문득 다시 저쪽 끝에 앉아 있는 그를 의식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여전히 여럿과 함께 대화에 집중해 있었고, 그 눈길은 단 한 번도 자신을 향하지 않았다. 마치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자연스러웠다. 소희는 젓가락을 들고 있던 손끝을 조심스레 조였다. 혹시 네가 내 마니또였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었다. 하지만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그 말은 결국 삼켜졌다.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현실적인 생각이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미 그 시절은 오래 흘러갔고, 편지는 빛바랜 추억으로만 남아 있었다.



웃음소리가 높아지고 술잔이 오갈수록 소희의 마음은 묘하게 분주해졌다. 지금처럼 그를 눈앞에 두고도 아무 말 못 하고 웃기만 하는 자신이 어쩐지 어리석게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괜히 그 기억을 꺼냈다가 모든 게 헛수고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뒤섞였다. 그래서 그녀는 웃음을 지으며 또다시 농담을 던지는 친구들의 이야기에 몸을 기댔다. 이 자리가 즐겁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속 깊은 곳에서 오래전 봉투 속에 남겨진 문장들이 다시금 가만히 깨어나는 듯했다.



소희는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잔을 들고 웃음에 맞춰주고 있었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여전히 그 애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다. 테이블 저편에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의 모습은 어쩐지 오래전과 겹쳐 보였다. 여전히 단정한 눈매와 무심한 듯 웃는 입매, 그리고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받아주는 태도까지. 변한 듯 변하지 않은 모습에 묘한 안도감이 일었다.


그때였다. 술이 오른 한 남자애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야야야, 이건 기억 안 나냐? 얘는 그때 마니또랑 만나기로 했다고 정문 앞에서 죽치고 기다렸는데, 결국 바람맞았었잖아!”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아 맞다, 그랬지!” 하고 떠드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테이블은 순식간에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어떤 애는 괜히 그의 어깨를 치며 놀렸고, 또 다른 애는 술잔을 높이 들며 “그때 진짜 불쌍했었는데” 하고 덧붙였다.


소희의 손끝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방금 말은 분명 그 애를 가리킨 것이었다. 교문 앞, 기다림, 바람맞음—그 모든 단어들이 소희의 오래된 기억을 찔러 올렸다. 그날의 교문 앞에서 서성이던 자신의 모습과 기다림 끝에 돌아가며 찢어버렸던 봉투. 그 모든 장면이 눈앞에서 겹쳐지듯 선명해졌다. 이해할 수 없는 내용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그는 멋쩍은 듯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얘길 뭐하러 꺼내냐” 하고 흘려보내듯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혼란했던 머릿속의 안개가 걷히듯 점차 선명해지고, 불현듯 무언가를 깨달은 소희의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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