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이야기
소희는 잔을 내려놓았다. 방금 들은 말이 귓속에서 천천히 되감기듯 맴돌았다.
'얘는 그때 마니또랑 만나기로 했다고 정문에서 죽치고 기다렸는데 결국 바람맞았었잖아.'
그 말이 장난처럼 흘러갔는데도, 마음 한구석이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정문에서 기다렸다고?
그녀는 무심히 웃으며 술잔을 비우려 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날, 자신의 발밑에 쌓이던 낙엽 소리, 기울어져 가던 햇살, 저물어가던 운동장의 그림자까지... 모든 장면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자신이 서 있던 곳— 후문 앞, 낡은 철문 옆의 가로등 아래 풍경이 너무도 선명했다.
“혹시, 너 그날... 진짜 기다렸어?”
그녀의 목소리는 낮게 떨렸고, 그 애는 고개를 돌려 소희를 바라보았다.
“응? 뭐, 그때? 아, 그 얘기? 기다렸지. 정문 앞에서 한참 있었어.”
그는 대수롭지 않게 웃었지만, 소희는 웃지 못했다. 정문이라는 단어가 자신의 뒷통수를 세게 후려치는 듯한 띵함이 머리를 울렸다.
“정문?”
“응. 정문 말이야. 거기서 진짜 오래 서 있었는데, 아무도 안 오더라.”
머릿속이 하얘졌다. 정문. 머릿속으로 빠르게 지난 편지를 떠올렸다. ‘내일 교문 앞에서 보자’ — 자신이 쓴 마지막 문장. 하지만 그 문장 어디에도 자신은 후문이라는 단어를 쓴 적이 없었다. 자신은 그 애에게 단지 '교문'이라고 썼을 뿐이었다. 그날의 내게 교문은 학교에서 집으로 이어지는 후문이 너무도 당연했던 탓에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 사실이 그제야 뼈저리게 되살아났다.
그녀는 웃으려 했지만, 입꼬리가 제대로 올라가지 않았다.
“나는... 후문에서 기다렸어.”
말이 떨어지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주변에서 내 말을 들은 다른 남자애들이 '어어?'하는 소리가 귀를 울리고,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붉어졌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화끈거리며 올라오는 열기가 느껴졌다. 이건 술기운일까, 아니면 감정이 올라온 탓일까.
"야! 박소희가 안승태 마니또였대!!"
왁자지껄하게 웃는 소리가 가게 안을 채웠다. 그 외침에 그 애는 멈칫하더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이내 허탈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우리 그날 서로 다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네.”
그는 가볍게 웃었지만 소희의 가슴속에서는 묵직한 파문이 일었다. 그날 자신이 느꼈던 외로움과 실망, 차가운 공기와 함께 찢어버렸던 편지의 조각들. 그 모든 게, 단 한 글자 차이의 오해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소희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숨이 새어 나왔다.
“그렇구나.. 너는 정문에 있었어..”
그 말이 그녀의 입술에서 천천히 흘러나왔다. 마치 오랜 세월을 돌아 이제야 제자리를 찾는 문장처럼. 승태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랬구나.”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술잔을 들어 천천히 입에 가져갔다. 그 짧은 동작 사이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눈빛 속에는 웃음도 미안함도 그리고 약간의 그리움도 섞여 있었다. 소희는 그녀가 읽은 그의 눈빛이 제대로 본 것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이제 와서 확실해진 사실은 서로의 기억 속에서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간에, 단지 다른 문 앞에 서 있었을 뿐이라는 걸. 그녀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진짜 어이없다, 그치?”
“응. 근데 좀… 그때답다.”
둘은 그렇게 웃었다.
늦은 밤, 식당의 불빛이 잔 위에 반사되며 잔잔히 흔들렸다.
그날 교문 앞의 햇빛과, 낙엽과, 그리고 지나간 세월이 한순간 그들 사이를 스쳐갔다.
이제는 늦었지만, 그 늦음마저도 그들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