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또 (3)

두근거림의 실마리

by 홍연

소희의 아침은 이전과 달라졌다. 알람 소리에 억지로 몸을 일으키던 날들이 많았는데, 마니또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한 뒤로는 눈을 뜨는 순간부터 마음이 묘하게 가벼워졌다. 학교에 간다는 단순한 이유가 아니라, 책상 서랍 속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봉투 하나 때문에 가슴이 먼저 설레었다. 아직 아무도 없는 복도에 들어서며 책상 서랍을 열 때의 그 순간은, 마치 비밀을 가진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은밀한 즐거움 같았다.



교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도, 칠판에 적힌 공지사항도, 종이 울리는 소리도 이전보다 더 선명해졌다. 사라는 쉬는 시간이 되면 괜히 서랍을 다시 한번 열어보았다. 혹시 새로운 편지가 들어 있지 않을까, 괜히 기대하면서. 어떤 날에는 없어서 살짝 실망하기도 했고, 또 어떤 날에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참으며 편지를 몰래 주머니 속에 숨기기도 했다.



편지를 쓴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구점이나 서점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진열대에 놓인 꽃무늬 편지지, 은은한 색감의 봉투, 혹은 작고 아기자기한 스티커에 자꾸만 발길이 멈췄다. ‘이런 종이에 적으면 더 기분이 좋을까?’, ‘혹시 상대가 이런 작은 장난을 좋아할까?’—별것 아닌 고민이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머무는 시간이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어주었다.


밤이 되어 책상에 앉으면, 숙제를 하던 손길이 어느 순간 멈추고는 편지지 위에 펜을 올려두고 있었다.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어디서부터 적어야 할지 한참을 망설이다가도 결국은 솔직한 하루의 한 조각을 옮겨 적었다. 때로는 두서없이 늘어놓은 말들이었고, 때로는 너무 평범해서 부끄럽게 느껴지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쓰고 난 뒤에는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무언가가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썼던 편지 중 하나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기분이 조금 울적했어. 특별한 이유는 없는데, 그냥 그런 날 있잖아. 그런데 수업 끝나고 서랍을 열었을 때, 거기 있던 편지를 보고 혼자 피식 웃었어. 누군지 모르지만, 너는 오늘 제 하루를 바꿨어.”



그 문장을 쓰며, 소희는 스스로도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상대가 누군지 모른다는 사실이, 오히려 모든 말을 더 솔직하게 만들었다. 이름이 없다는 건, 곧 얼굴도 없이 마음만 오가는 세계를 뜻했다. 그래서 더 쉽게 기댈 수 있었고, 그래서 더 빠르게 마음이 기울어졌다.


편지를 기다리는 일이 습관이 되자, 소희는 어느새 학교에 오는 발걸음마저 가벼워졌다. 아침 교문을 지날 때마다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고, 수업이 끝나 종이 울릴 때면 가장 먼저 서랍이 떠올랐다. 수학 문제를 풀다 막히는 순간에도, ‘오늘은 어떤 답장이 와 있을까’라는 기대가 작은 힘이 되었다.


예를 들어, 몸이 피곤해 지쳐 있던 날, 서랍 속 봉투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너무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잠깐 멈춰서 숨 쉬는 것도 공부의 일부니까.”




그 문장을 읽던 순간, 소희의 눈앞이 찡해졌다. 마치 누군가가 그녀의 피곤한 어깨를 조용히 두드려준 것만 같았다. 이름 없는 위로였지만, 그 위로는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그녀의 마음에 닿았다. 또 어떤 날엔 시험 결과가 기대만큼 나오지 않아 책상 위에 엎드려 울고 싶었던 날에도 작은 봉투 속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점수는 네가 아니야. 네가 웃을 때, 네가 친구에게 따뜻하게 말할 때, 그게 네 진짜 모습이야.”



그 편지를 읽고 난 뒤 소희는 혼자서 오랫동안 공책 위에 펜을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어떻게 이렇게 그녀의 하루를 알고 있는 것 같은지 그게 신기하고 묘하게 따뜻했다. 그 애의 글을 읽고 있으면 마치 자신과 편지를 나누는 상대가 나라는 걸 꼭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학교 가는 길 자체가 기다려졌다. 단지 수업을 듣는 공간이 아니라, 작은 편지로 서로의 하루를 건네는 교실이었기 때문이다. 누군지도 모르는데 자꾸만 마음이 기울고,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정이 들어가는 기분. 그 낯선 감각은 이상하게도 소희의 하루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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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희는 또 하나의 편지를 서랍 속에서 꺼냈다. 평소처럼 가지런히 접혀 있었고, 모서리에는 늘 붙어 있던 작은 스티커가 있었다. 무심코 봉투를 뜯으며 ‘오늘은 어떤 말을 적어놨을까’ 하는 가벼운 설렘이 먼저 찾아왔다. 그런데 종이를 펼친 순간, 그녀의 눈길이 글자 하나에 머물렀다.



“오늘 하루가 힘들더라도, 결국 네가 스스로를 지탱해낼 거라는 걸 믿어. 네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 문장은 따뜻했지만, 소희의 시선은 내용보다도 글씨 모양에 고정됐다. 분명 ‘ㅅ’을 적는 방식이 낯설지 않았다. 획이 조금씩 기울어져 있고, 끝이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가 있었다. 고등학교 내내, 어느 친구가 칠판에 필기를 하면 늘 놀리던 바로 그 습관이었다. ‘야, 넌 왜 글씨가 꼭 춤추는 것 같냐’며 웃곤 했던 기억. 그 장난스러운 말투와 웃음소리가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손끝이 편지지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잉크가 살짝 번진 곳, 획이 불균형하게 이어진 곳, 그리고 종이를 눌러 쓴 흔적. 익숙했다. 너무나 익숙했다. 하지만 동시에,확신할 수는 없었다. 수많은 글씨가 섞여 있던 학급에서 우연히 닮은 필체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은 이유 없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이제껏 해보지 못한 의심이 가슴 위로 쑥 올라왔다.



‘설마… 그 애일까?’



머릿속에 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쉬는 시간마다 과자 봉지를 흔들며 장난을 치던 아이, 발표할 때는 쑥스러워서 머리를 긁적이던 아이, 그리고 종종 소희에게 농담을 건네곤 하던 아이. 편지를 쓰던 손끝이 바로 그 얼굴과 겹쳐지는 순간, 소희는 숨을 고르듯 깊게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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