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또 (2)

첫 번째 편지

by 홍연

밤늦게 집에 돌아오고 현관문을 닫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 종일 모니터 불빛과 문서더미에 매달려 있던 눈은 여전히 뻑뻑했지만 마음은 오히려 어딘가 가벼웠다. 회사 책상 위에 쌓였던 보고서와 피로로 단단히 뭉친 어깨와는 달리, 오늘 밤 그녀의 심장은 오래된 무언가에 의해 느슨하게 풀린 듯 조금 들뜬 리듬을 품고 있었다. 가방을 무심히 책상 위에 내려놓고 가만히 방 안을 둘러보던 그녀의 시선은 책상 아래로 향했다. 가장 밑이 아닌, 두 번째도 아닌, 맨 아래에서 세 번째 칸. 늘 자물쇠 없이 열리던 낡은 서랍이 묘하게 그녀를 불러세웠다.


조심스럽게 서랍을 당기자 오래된 종이 냄새가 스며 나왔다. 안쪽에는 차곡차곡 겹쳐 쌓인 봉투들이 고요히 누워 있었다. 바래고 조금은 구겨진 모서리들이 세월을 말해주었고, 각기 다른 색과 모양의 편지지가 서로 기대듯 포개져 있었다. 소희는 망설이다가 무심히 손에 잡히는 봉투 하나를 꺼냈다. 봉투를 열고 펼쳐든 순간, 그 안에는 오래전 앓았던 감기가 덮어두었던 기억과 함께, 자신을 다독여주던 글씨가 있었다.



“오늘 하루 종일 힘들었지? 몸이 아프면 마음도 덩달아 무거워지는데, 네가 잠깐 쉬어가도 괜찮다는 걸 꼭 기억했으면 좋겠어. 네가 쉬어도 세상은 잘 돌아가니까. 그러니 오늘은 따뜻한 물 많이 마시고, 조금은 이불 속에 일찍 들어가. 내일 아침엔 아픈 게 조금 나아 있기를, 진심으로 바랄게.”



고등학교 3학년, 몸살로 수업에 제대로 앉아 있지 못했던 그날의 공기까지 편지 속에서 되살아나는 듯했다. 붓펜 잉크가 눌린 자리에 남아 있는 힘의 결, 글씨체 사이로 묻어난 다정한 결이 지금 이 순간 그녀의 가슴을 다시 찡하게 흔들었다. 소희는 손끝으로 편지지를 쓰다듬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 애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여전히 누군가의 하루를 그렇게 따뜻하게 위로해주고 있을까. 그런 질문이 마음속에 조용히 맴돌았다. 그러나 곧 그녀는 편지를 접어 다시 봉투에 넣고, 차곡히 제자리에 되돌려 두었다. 방 안에 불빛은 고요했고 마음은 묘하게 적셔져 있었다. 그렇게 오래된 위로를 다시 한 번 마주한 채 소희는 천천히 하루를 마무리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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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토요일이라면 늦잠을 자도 좋을 날이었지만, 눈은 이상하리만큼 이른 시간에 저절로 떠졌다. 창문 너머로는 가을 하늘이 맑게 펼쳐져 있었다. 먼지가 낀 듯 탁하지 않고 새로 씻어낸 듯 파랗게 투명한 하늘이었다. 구름은 가볍게 풀어헤친 솜조각처럼 이곳저곳에 떠 있었고 공기에는 아직 밤의 차가움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 상쾌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



소희는 부엌으로 가 식빵 한 조각을 토스터기에 넣고 커피포트에 물을 채워 버튼을 눌렀다. 끓어오르는 물의 잔잔한 소리와 점점 갈색빛을 띠며 구워지는 식빵의 고소한 냄새가 아침 공기 속으로 흘러나왔다. 일상의 소소한 순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의 공기는 어제와 달랐다.



씻고 옷을 갈아입으며 머리를 말리던 소희의 눈이 문득 책상 위에 놓인 편지에 멈췄다. 어젯밤 펼쳐 읽었던 바로 그 봉투였다. 편지를 바라보자 다시금 처음으로 ‘그 세계’에 발을 디뎠던 순간이 떠올랐다. 누군가의 익명 속 따뜻함을 처음 받아들였던 날. 교실 안, 칠판에 적힌 단 세 글자로 시작된 작은 이벤트.


그 기억은 천천히, 그러나 뚜렷하게 그녀를 다시 끌어당겼다.



“얘들아, 너희 수능 준비하느라 많이 지쳤지? 선생님이 재미있는 걸 하나 해보려고 한다.”



교탁 앞에 서 있던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되살아났다. 한껏 웅성거리며 기대에 찬 아이들의 얼굴 위로, 선생님은 분필을 들어 칠판에 큼직하게 글자를 쓰셨다.



‘마니또.’



교실 안에서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 “에이—” 하는 아이들의 불평 섞인 목소리에 선생님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작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어가셨다. 단순히 서로의 짝을 정해 돕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정체를 감춘 채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응원하고 위로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겠다고. 누가 누구인지 모른 채, 단지 글자와 작은 선물에 의지해 한 해를 함께 버텨보라고.



그렇게 소희에게 주어진 쪽지통의 번호는 ‘21번’이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그녀는 연필을 들고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결국 종이에 ‘안녕?’ 두 글자만 적었다. 그걸 봉투에 넣어 쪽지통에 밀어 넣으면서도, 속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뭐, 설마 진지하게들 하겠어?”



하지만 다음날 아침, 통을 열었을 때 가지런히 놓인 봉투 하나가 그녀의 시선을 단숨에 붙잡았다. 단정히 접혀 있던 그 종이를 조심스레 꺼내어 친구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화장실로 달려가 문을 걸어 잠갔다. 차가운 타일 벽에 등을 기대고 봉투를 열자 그 안에는 삐뚤빼뚤하지만 이상하게 다정한 글씨가 있었다.



“뭐라고 써야 할지 잘 모르겠네. 그래도, 오늘 네 하루가 조금은 덜 힘들었으면 해서 적어봤어.”



짧고 두서없는 문장이었지만, 그때 소희의 가슴 속에는 설명하기 힘든 작은 두근거림이 피어올랐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이름 없는 따뜻함으로 다가왔다는 사실. 그게 바로, 두 사람의 첫 번째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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