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질 것에 마음이 기울었다 (7)

걸어야만 했던 밤: 그 남자 이야기

by 홍연

잠에서 깨어났다는 걸 알아차리기 전에, 먼저 어둠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아직 햇살이 방 안에 닿기 전 가장 깊은 어둠과 가장 고요한 정적이 교차하는 시각. 창문을 닫고 드리운 커튼의 틈 사이로 아주 연한 빛이 미세하게 스며들고 있었고, 방 안을 감싸고 있던 밤의 온도도 어느새 조금씩 식고 있었다.



공간에 스며 있는 기묘한 정적을 느끼고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올렸을 때, 처음으로 느껴진 것은 공기 속에 남아 있는 누군가의 숨결, 그 따뜻한 여운이었다. 나는 아주 천천히 눈을 떴고, 어둠 속에서 내 곁에 누운 그녀의 윤곽을 발견했다. 그녀는 담요 한 장에 가볍게 몸을 감싼 채, 얼굴을 살짝 나에게 향하고 있었다. 얇게 내려앉은 담요 속에서 그녀의 등은 작고 잔잔한 호흡을 따라 천천히 오르내렸고,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표정은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그녀의 눈꺼풀 위로 미세하게 떨리는 속눈썹, 바람에 닿은 듯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 그리고 내가 어젯밤 붙잡았던 손이 여전히 담요 위로 살짝 드러나 있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게 될 것이란 걸, 아니 어쩌면 이 아침의 공기와 그녀의 숨소리를 평생 마음 어딘가에 담고 살게 될 거라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고요 속에서, 지난밤을 되짚듯 작은 장면들이 순서 없이 떠올랐다. 낯선 해안 마을의 이층 게스트하우스, 야외 파티의 잔잔한 불빛, 와인의 무게, 두어 마디 지나간 대화, 바닷가에서의 침묵과 입맞춤, 그리고 이 작은 방 안의 정적. 이 모든 것이 마치 꿈인 듯 불분명하고, 동시에 현실보다도 선명하게 뇌리를 휘감았다.



그 순간 내가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걸 직감했다. 무언가를 잃은 뒤의 감각은 종종 이렇게 다정하고 잔인하게 찾아왔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방 안 가득히 퍼진 밤의 잔향이 폐에 스며들었다. 바닷바람과 촛농, 살 냄새와 땀냄새가 섞인 그것은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는 감각이었고, 동시에 다시는 겪을 수 없을지도 모를 감각이기도 했다.



그녀의 어깨에 얇게 내려앉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나를 향해 미세하게 흘러와 있었다. 나는 그 가늘고 부드러운 선 하나하나에 마음이 붙들리는 걸 느꼈다. 그녀는 나에게 어떤 말을 요구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증명하라고, 설명하라고 하지 않았다. 다만 존재했고, 바라보았고, 닿았다.



그래서 더욱 겁이 났다. 나는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조용히 이불 끝자락을 들어올려 몸을 빼냈다. 불필요한 소음 하나도 만들지 않기 위해 이불을 젖히는 손끝까지도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바닥을 딛는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천천히 움직였고,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무언가를 밀어내듯 무거웠다. 옷을 주워 입고, 소매를 정리하면서도 나의 눈은 자꾸만 침대 위의 그녀를 향해 돌아갔다.



모든 것이 말없이 흘러가는 공간이었다. 소리도 감정도 그 안에서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창가로 다가가 커튼 틈으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동쪽 하늘은 아주 천천히 색을 바꾸고 있었고, 멀리서 바닷새의 울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옅게 들려왔다.



이곳에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었다. 언제나 머무르기엔 지나치게 빨리 무너져온 것들을 상기시키며 다시금 마음을 추스렸다. 서울에서의 삶, 어깨 위의 명함들, 부모의 기대, 결혼이라는 이름의 합의—


법정에서의 마지막 변론을 마치던 날, 나는 그 모든 것을 스스로의 손으로 정리하고 도망치듯 이 작은 해안 마을로 내려왔다. 정해진 일정도, 목적지도 없이 늘 안전한 선택만 강요하던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그저 멀어지고 싶다는 욕망 하나로 표류하듯 여기까지 도달한 데는 깊은 이유가 없었다. 낮에는 가만히 걸었고, 밤에는 글을 썼다. 무언가 안에서 계속 부서지고 무너지는 것을 붙잡기 위한 글. 그리고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나는 여기에 있어도 되는 사람인가.



그리고 이 여정의 마지막 며칠이, 오히려 나에게 가장 깊이 남을 시간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신에게조차 뜻밖이었다. 하지만 그 밤, 그녀는 무언가를 말하지 않고도 너무 많은 것을 건넸다. 그저 함께 있었을 뿐인데 그 무엇보다 진심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질문이 없었고,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도 없었다. 그저 한 사람으로서 그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 시선 속에서 어쩌면 자신이 다시 사람이 되어도 좋겠다는 착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 착각은 너무 따뜻했고, 동시에 너무 위험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엔 아직 너무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 채로 머무르다 보면 또다시 망가질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떠나기로 했다. 무언가를 말하거나 묻기 전에. 그녀가 침묵을 선택했듯, 자신도 침묵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것이 최소한의 예의라 믿었다. 아니, 내가 견딜 수 있는 마지막 감정의 한계선이 거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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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게스트하우스의 복도는 여전히 적막했고, 나무 바닥은 밤의 냉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기나긴 복도는 밤의 어둠을 거의 다 걷어낸 상태였다. 벽에 걸린 액자, 어젯밤 사람들이 걸어 다니며 남긴 와인 병과 컵들, 닫힌 방문들—모든 것이 낯익고 동시에 낯설었다.



이제 이 공간도, 나의 것이 아니었다. 잠깐 머물렀을 뿐인 사람이 남긴 흔적은 이른 아침의 햇갈처럼 금세 사라지고 만다. 나는 천천히 공용공간으로 향했다. 기억 속에서는 어제 낮에도 사람들이 북적이던 그곳이, 이 아침엔 너무도 적막했다. 커다란 창이 있는 그 공간은 밤새 불이 꺼져 있었지만, 동이 틀 무렵의 빛이 은근하게 번지고 있었다.



긴 테이블 위에는 누군가 마신 커피잔 두 개가 남아 있었고, 한쪽에는 여행자 노트와 몇 자루의 펜이 흩어져 있었다. 그 위로 서서히 물드는 햇빛을 바라보며 나는 의자에 앉았다. 책장을 넘기며 무심히 다른 여행자들의 흔적을 훑었고, 그 글귀 하나하나가 어쩐지 낯설고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누군가는 ‘오랜만에 나를 숨 쉴 수 있게 해준 밤이었다’고 적었고,

누군가는 ‘이곳의 별빛은 사람을 바보처럼 정직하게 만든다’고 적어두었다.



그 아래, 빈 공간에 천천히 펜을 들어 아무도 모를, 그러나 어쩌면 그녀라면 어딘가 닿을지도 모를 한 줄을 남겼다.



“어떤 밤은,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걷게 만든다.
멈추고 싶은 마음보다, 그냥 더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조금 더 앞서는 밤.”



마침표 하나까지도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더는 이름도, 날짜도, 이별이라는 말도 필요 없을 말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더 붙여야 할까, 혹은 이름 한 자라도 남길까 망설였지만, 결국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이것이 내 마음의 전부였다. 그렇게 문장을 쓰고 난 뒤,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펜을 내려두고 노트를 덮으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침대에서 눈을 뜰 그녀를 떠올렸다. 햇살 아래에서 커튼을 젖히고, 어쩌면 공용공간에 와 노트를 펼칠 그녀를. 그 순간, 그녀가 이 문장을 읽을지 아닐지, 내가 쓴 것이라 눈치 챌지 아닐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 한 줄만큼은, 진심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현관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햇살이 아직 희미하게 번지는 골목길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향하며, 아주 낮고 잔잔한 목소리로 스스로에게 말하듯, 혹은 이 공간 어딘가에 남겨질지도 모를 그녀의 기척을 향해 중얼거렸다.



“잘 지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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