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또 (1)

다시 열리는 가을

by 홍연

박소희는 사무실 한쪽 모니터 불빛 아래 앉아 있었다.


밤 열 시를 훌쩍 넘긴 시각, 회사 건물의 대부분 층은 이미 어두웠지만 그녀가 있는 층만은 회색 형광등과 모니터들이 희미한 전쟁터처럼 깜박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여전히 처리해야 할 문서가 가득했고 반쯤 마신 종이컵 커피가 식은 채로 바닥에 살짝 얼룩을 남기며 그녀의 손끝 근처에 놓여 있었다. 하루 종일 쳐다본 보고서 속 숫자들이 더는 의미를 가지지 않는 순간이었지만, 소희는 커서를 조금씩 옮기며 문장을 다듬고 있었다.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는 빈 사무실에서 유난히 또렷하게 울렸고 에어컨 바람이 서류 모서리를 스치는 작은 사각거림이 그 뒤를 따라왔다. 어깨와 목이 단단하게 굳어 있었고 눈은 자꾸만 건조해졌지만, 마감 날짜는 사람의 피로를 고려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 문단을 고치고, 다시 읽고 또 지우기를 반복하던 중, 책상 위에 놓아둔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처음엔 업무 메시지일 거라 생각했지만, 화면을 켜자 ‘서정고3-3반 단톡방’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반갑고도 낯선 이름이었다. 그 아래로 초록 말풍선들이 연달아 올라오고 있었고, 그 안에는 누군지 금세 알 수 있는 말투와 웃음, 오래된 장난들이 오가고 있었다.



— 얘들아, 이번 주 일요일에 동창회 한다!

— 와 진짜 몇 년만이냐

— 다 와야 된다, 결석금 있음ㅋㅋ

— 소희 너도 꼭 와



손끝이 스크린 위를 천천히 스쳤다. 그 대화 속 웃음과 이모티콘 사이에서 소희는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회사에서의 오늘 하루가 여전히 무겁게 어깨 위에 얹혀 있었지만, 그 무게 틈새로 오래전 공기의 냄새가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마치 잊고 있던 오래된 서랍이 살짝 열리듯 그 속에서 희미한 빛과 먼지가 한꺼번에 피어올랐다. 그녀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짧게 답장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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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나도 갈게.


단 네 글자, 그보다 더 간단할 수 없는 문장이었지만, 전송 버튼을 누른 순간 소희의 시선은 화면에 멈춰 있었다. 문자 하나하나가 아직도 미세하게 진동하듯 눈앞에서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 짧은 대답이 단순히 ‘참석 여부’만을 전한 건 아니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거기엔 어쩌면 조금 더 멀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 잊었다고 생각했던 시간을 다시 건드려 보고 싶은 마음이 묻어 있었다.



손에 들린 휴대폰의 온기는 금방 식어갔지만, 마음속에서는 오래전 바람의 결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그건 확실히 고등학교 3학년 겨울의 냄새였다. 교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던 바짝 마른 찬 공기. 창틀 아래 놓인 히터에서 올라오던 묘하게 철 냄새가 섞인 따뜻함. 칠판 앞에 서서 분필을 부러뜨리던 담임의 손끝. 그리고 쉬는 시간마다 책상 위에 엎드려 졸던 친구들의 숨소리.



그 모든 장면 위에, 한 가지 특별한 기억이 얹혀 있었다. 마니또. 누가 누구를 지켜보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 채, 몰래 무언가를 건네던 시간. 하얀 봉투 안에는 그날의 기분을 가만히 어루만지는 문장들이 들어 있었고, 그 문장은 늘 조금의 숨을 고르게 했다. 편지를 열 때면 잉크 냄새와 종이 냄새가 섞여 났다.


그 글씨체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는데, 볼펜이 종이 위를 스칠 때 살짝 눌린 부분마다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 사람이 건넨 편지는 언제나 절묘하게 그녀의 하루를 어루만졌다. 수학 시험이 유난히 망쳐서 울고 싶은 날에도, 책상 서랍 속에는 작은 초콜릿과 “오늘은 그냥 잠깐 쉬어가도 돼”라는 글씨가 있었다. 그 글씨체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고, 획이 조금씩 기울어져 있었는데, 볼펜 잉크가 번진 자리마다 그날의 손길이 묘하게 느껴졌다. 편지를 접는 방식도 늘 같았다. 정확하게 사각형이 되게 반듯하게 접은 뒤 꼭 모서리에만 작은 스티커를 붙여두었다.



가끔은 편지 봉투 옆에 작고 투박한 간식이 함께 놓여 있었다. 별것 아닌 초콜릿 한 조각, 마트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젤리, 혹은 작은 메모지에 그려진 엉성한 그림 같은 것. 그건 시험을 망친 날에도, 친구와 다투고 난 날에도, 심지어 아무 일 없는 평범한 하루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마치 ‘네 하루를 보고 있다’는, 말로는 하지 않는 약속처럼.



그 사람의 정체를 끝내 알지 못했다. 마니또 공개날, 누군가의 입을 통해 이름을 듣게 될 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날 아침 그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뒤로도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고, 졸업식에도 그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렇게 이름 없는 온기가 고스란히 남은 채, 봉투 속 편지처럼 마음 한쪽 서랍에 묻혀버렸다.



그리고 방금, 휴대폰 화면 속 친구들의 웃음과 농담 사이에서, 그 오래된 봉투가 다시 열리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손끝이 낡은 종이를 다시 쥔 듯, 그때의 감촉과 냄새가 그대로 살아났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그래, 나도 갈게’라는 대답을 보내는 순간, 단순히 동창회에 간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그날의 교실과 그 책상과, 그 안에 숨겨진 작은 봉투까지 모두 향해 걸음을 옮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희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고르며, 휴대폰 화면을 꺼버렸다. 그리고 여전히 야근 서류로 가득한 책상 위를 바라보다가, 알 수 없는 충동에 미묘하게 몸이 기울었다. 내일 동창회에 가기 전, 그때의 공간을 먼저 찾아가고 싶었다. 단지 기억 속의 온기를 다시 한번 손끝에 올려놓고 싶어서. 그 사람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때 자신을 위로했던 시간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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