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매트릭스) 아웃라이어, 복학왕의 사회학, 칸 아카데미, 기본서비스
그리스의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방패 ‘아이기스’에는 사람을 돌로 만드는 메두사의 머리가 박혀 있다. 곱씹을수록 기묘한 이 조합을 두고, 이건 지식의 빛과 그림자를 뜻한다는 해석이 있다. 지식은 사람을 지키고 강하게 만들어 주지만, 때론 우리가 새로운 걸 받아들이는 데 방해가 된다. ‘내가 이거 10년 했는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라는 식. 아이러니하게도 지식이 사람을 돌로 만드는 것이다.
세계적인 비즈니스 작가 말콤 글래드웰은 아웃라이어, 즉 어떤 분야에서 비범함을 드러내는 인물들에겐 ‘1만 시간의 경험’이 있었음을 주목했다. 1만 시간은 하루에 3시간씩 1년에 1천 시간, 꼬박 10년을 쏟아부어야 다다를 수 시간이다. 특히 그는 2009년 ‘허드슨 강의 기적’, 새 떼로 엔진이 모두 날아간 여객기를 강 위로 착륙시켜 승객 모두를 살린 사건을 두고, ‘1만 9,000시간의 비행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강조했다.
비범함은 평범함이 쌓여 만들어진다는, ‘야 너두? 야 나두!’라며 꿈과 희망을 주는 메시지겠지만, 어떻게 보면 참 불편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누구나 갈 수 있지만, 10년 걸리는 영역이라면, 시간은 그 자체로 거대한 벽이 된다. 1만 9,000시간을 쏟아부었는데, 세상이 변했다고 그 노력을 도매금으로 넘기려 하면 누가 가만히 있겠나. 메두사의 석화가 단지 개인에 국한되는 게 아닌 것이다. 사회에까지 그리고 생각보다 길게 이어진다.
‘문화자본’이라는 개념이 아이를 키울 때 종종 이야기된다. 경제 분야에서 자본은 공장, 설비 등 생산의 기반이 되는 자산을 뜻하는데, 문화자본은 그러한 맥락과 유사하게 한 개인의 교양을 형성하는 문화적 지식의 총화다. 내 아이에게 부를 풍족히 물려주진 못해도, 문화적인 교양, ‘문화자본’만큼은 넉넉하게 주고 싶다는 말들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대개 잘 사는 집안의 자녀들이 문화자본이 더 풍부하다.
‘복학왕의 사회학’은 이 대물림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흥미롭게 전한다. 이 책은 서울 중심주의라는 한국 사회구조 아래 지방대생, 나아가 지방이라는 사회가 어떻게 악순환의 늪에 빠져드는지를 다뤘다. 저자 최종렬은 당사자 인터뷰 등 따끈따끈한 실증자료를 바탕으로, 열악한 지방의 삶 속에서 어떻게 그들이 ‘보수주의적 가족주의’로 빠져드는지를 면밀하게 추적했다.
경쟁에서 밀려난 그들이 인정받지 못한 채, 적당주의를 고수하며 자신들의 보금자리에 가족들과 웅크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나마 보금자리가 있었기에, 지방의 악순환이 어느 정도 완충이 이뤄졌다 할 것인데, 여기에 문화자본을 곁들인 해석이 더해진다. 문화자본의 축적은 반복 학습을 위한 엄청난 시간 투자를 요하지만, 지방대생을 둘러싼 여건은 그들에게 그걸 마련해주지 못해, 점점 수도권과의 격차가 확대된다는 것.
문화자본은 사실상 계급 재생산의 핵심고리다. 지방대 부모가 자녀에게 낮은 기대를 갖고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는 것은 지역 문제라기보다는 계급 문제다. 먹고살기 바빠서 그렇기도 하지만, 애초에 물려줄 문화자본도 별로 없다. 사교육이라도 시켜야 할 텐데 경제자본이 없다 보니 그렇게 할 수 없다. 기대를 낮추는 수밖에. 최고의 기대는 9급 공무원! 문화자본 없이 노력 끝에 붙을 수 있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공정한 게임이다.
- 복학왕의 사회학, ‘상징권력 없는 문화자본’
결국 문제의 본질은 시간이다.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문제다. 누구나 할 수 있다며 사탕발림을 일삼지만, 실제론 누구는 할 수 없는 이 간극은 ‘가능한 소수’와 ‘불가능한 다수’를 나눠 보이지 않는 격차를 점점 공고히 해나간다. 그것은 하나의 벽이자 하나의 돌이요, 세상의 변화를 가로막는 저항의 원천이다. 그렇다. 제2차라고 할 것도 없이 이미 러다이트 운동은 여기저기서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칸 아카데미’라는 유명한 무료교육 사이트가 있다. 조카에게 수학을 가르쳐주려고 ‘유튜브’에 영상을 올렸던 게 대박이 나서 지금의 아카데미로 거듭났는데, 이 설립자 살만 칸을 어쩌다 알고리즘 신의 선택을 받은 일개 유튜버로 생각하기 쉽지만, MIT와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나와, 헤지펀드 분석가로 일했던 ‘난 놈’이었다. ‘긁지 않은 복권’이란 게 이런 느낌일까. 아무튼 칸은 아래와 같은 말을 남긴 적이 있는데 사뭇 의미심장하다.
“중세 수도사나 학자에게 농노 중 몇이나 글을 배울 수 있을 것 같냐고 물어봤다면, 그들은 2~3퍼센트 정도만이 배울 수 있으리라고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99퍼센트에 가까운 사람이 글을 배울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양자물리학을 공부할 만큼 똑똑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2~3퍼센트 정도에 불과할 것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이것은 중세 수도사처럼 근시안적인 대답입니다. 만약 제대로 된 배움의 도구만 주어진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똑똑해질 수 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 칸 아카데미 설립자 샐 칸의 연설
돈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이 ‘시간의 석화’를 무너뜨리는 데, 이 AI가 ‘백마 탄 초인’ 되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 네오와 그 일행이 중국 무술이나 헬기 조종술을 순식간에 다운받아 능수능란한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이야 우리가 묻는 걸 답변해 주는 정도지만, 추후엔 우리가 물어보지 않아도 지식을 적재적소에 우리에게 밀어 넣어줄 수 있을 것이다. ‘다운로드’하듯이 간편하고, 저렴하게, 그리고 지금보다 더 멀리.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우리의 교육과정은 여차저차하면 장장 20년에 달한다. 여기서 아이들이 어떤 학문적 아웃풋을 터트린다면 그건 그거대로 더할 나위 없겠지만, 주 목적은 이 사회에 필요한 기초 역량을 함양하는 것이라 하겠다. 보통의 학문적 아웃풋, 보통 학문적 성과라는 건 대학교 이후의 석박사들에게서, 대학교나 기업 연구소 등에서 나오지 않는가.
AI가 인간의 주요 분야를 잠식하는 이 상황에서, 때때로 이 20년이 너무 긴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십수 년에 걸쳐 수학을 공부하지만, AI가 더 빠르고 정확하다. 글도 구글 제미나이가 야무지게 써준다. 영어, 영어. 귀에 딱지가 얹히게 들었는데, 네이버 파파고가 세련되게 통역 잘해준다. 곧 장착형 번역기가 나올 기세. 이처럼 비용 대비 편익이 급락 중이라면, 비용을 줄여 가성비를 내야 하지 않을까. 10년으로 반토막 내서 말이다.
10년 반토막이면, 30살에 취업할 거 20살에 할 수 있다는 말이다. 20살에 주구장창 골방에 처박혀 취업준비, 시험공부만 하는 것보단. 마음에 드는 일자리로 밥벌이하다, 심장을 찌르는 사랑을 만나, 심장마저 팔릴 때까지 탈탈 털려보기도 하고, 중남미 다리엔 지협에서 마약 카르텔을 만나 목숨 걸고 튀어 보는 멋진 해외여행을 해보기도 하고. 훨씬 낫잖은가. 20대 때 여행이나 연애 많이 해본 애들이 부러워서 그러는 거 결코 아니다.
자율주행차 도입이 화물운송 기사들에게 연간 4만 달러 연봉을 주며, 유급 백수로 만들어 버릴 수 있고, AI 체스가 똑같은 인풋을 넣어도 예전보다 월등한 아웃풋을 만들어줄 수 있다면, 적극적으로 AI를 교육과정에 밀어 넣어 작금들의 청년들이 진정 그 용어(靑年)에 걸맞은 푸르른 때를 만끽할 수 있게 해 주자. 시간의 붕괴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간 공고해져 가는 벽을 허무는 건 덤이다.
우려되는 게 없는 건 아니다. ‘10년 반토막’의 신규 교육과정은 어떻게 재편할 것이며, 기존 교육과정에 얽혀 있는 산업 종사자들은 뭐 먹고살 것이며(우리 와이프 뭐 먹고살아...), 너무 디지털 기기와 그 기기의 콘텐츠에 익숙해진 나머지, 오히려 문해력 등 가장 기초적인 역량에서 아이들의 미달이 나오는 건 어떻게 할 건지 등등. 그 모든 불안은 지극히 합당하다. 전인미답의 길 아닌가. 당연히 배척하고 멀리하고 싶어진다.
구한말 척화비 등을 세우며 위정척사 운동을 벌였던 구 시대의 양반들을 지금의 우리는 시대에 뒤떨어진 한심한 것들이라고 비웃지만, 막상 우리가 그 당시로 가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 당장 2015년 우버가 한국에 들어오는 게 막혔고, 2019년 카풀이 막혔다가, 2021년에는 타다가 막혔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고 사회가 고도화됐다고 한들, 똑같은 한반도 땅바닥에서 나고 자랐는데, 크게 달라질 건 없는 법이다.
그래도 이 양반들을 난 존경 한다. 이분들이야말로 항일운동의 근본이자, 무장독립투쟁을 하신 분들이다. 개방을 부르짖다가 사회진화론에 마개조된 개화파들과는 결이 다른 분들인 것이다. 우버와 타다를 막았던 작금의 리더들 또한 외세에 우리나라가 신음할 때, 다시금 분연히 일어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왜 선빵 맞는 게 기본으로 깔려있는지에 대해선 의문을 갖지 말자. 한반도의 유구한 전통이다. 평화의 민족 아닌가.
중세라는, 신의 품 안에서 자신을 정의했던 시대를 지나, 근대에 이르러 인간은 자신을 주체로 바로 세웠다. 스스로를 신의 자리에 좌정시킨 것이다. 신에게 눈이 가려졌던 인간은 비로소 스스로가 무식했다는 걸 받아들였고, 이 통렬한 자아비판은 우리로 하여금 ‘진보’하게끔, 합리주의와 계몽주의 등을 거쳐 눈부신 인류의 금자탑을 쌓을 수 있게 채찍질하는 근간이 되었다.
다만, ‘자유는 불안의 현기증’이라는 말이 있듯, 무식함에서 시작한 진보의 파국은 예정된 것이었다. 유럽 남성을 표준으로 성립된 ‘진보’는 아프리카 흑인을 물건으로 취급하는 노예무역을 낳았고, 오리엔탈리즘이라며 동양을 여성,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아집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처맞지 못해 너무 비대해져 버린 그 자아는 세계대전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벌이는 삽질로 이어져, 인간 이성에 대한 회의를 촉발했다.
신을 몰아냈던 인간은 결국 그 자리에 기계를 앉히게 될 것이다.
인류의 기술은 지금까지도 눈부시게 진일보하고 있지만, 인간의 정신은 애초부터 신의 자리에 앉을 깜냥이 안되었다. 지성 자체의 한계다. ▲당장 대상의 본질을 탐구하려고 해도, ‘나는 ‘나를 생각한다’를 생각한다’라는 식으로 왜곡된 본질로 미끄러질 뿐이고, ▲이 세상 인과관계의 맨 처음이자, 모든 것의 근원을 뜻하는 ‘과학의 제1원인’ 또한 현대 과학에선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나아가고 있다는 것들은 다 이 제1원인 이후의 것들이다.
한번 쫓아냈던 신을. ‘아휴, 형님 어릴 땐 다 실수도 하고 그런 거죠. 헤헷!’이라며 다시 올리는 것도 모냥 빠지는 일이다. 이 주체의 자리에 누구를 올려야 할까. 나보다 머리도 좋고, 일도 잘하고, 여차하면 일단 나부터 챙겨주고 보는 그런 맞춤형 키다리 아저씨, 얼굴 없는 천사! 그렇다. 체임버다. 믿을 건 ‘나는 파일럿 지원계발 시스템’이라며, ‘그대가 보다 많은 성과를 올려야 존재의의를 달성한다’라는 폭풍간지 AI로봇 체임버뿐이다.
다시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조언’을 되짚어 보면, ‘보편기본소득’뿐만 아니라 ‘보편기본서비스’라는 개념이 제시된다. 전자가 알고리즘과 로봇으로 세상의 부를 끌어모은 기업과 자본가에게 세금을 물려 전 국민에게 기초생계비를 주는 것이라면, 후자는 아예 생계비뿐만 아니라 교육, 의료, 복지 등 사는 데 필요한 모든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이걸 두고 ‘자본주의 낙원이냐, 공산주의 낙원이냐’로 요약했다.
챙길 게 있으면 다 챙겨야 하는 법. 그래서 우린 보편기본소득을 넘어, 보편기본서비스까지 부르짖어야 한다. 그래야 이 서비스의 끝, 보편기본서비스라는 사회적 캡슐에 감싸인 우리의 그 끝은 영화 ‘매트릭스’ 속 기계의 인간 사육...이 아니라 디지털 코쿠닝, ‘체임버 속에서 따스한 케어를 받는 레드’가 될 것이다. 오타쿠의 꿈 그 자체! 워쇼스키 누나들이 너무 부정적으로만 봤어. 굳이 좋은 말도 있는데 그렇게 해야 돼?
지금까지 AI에 대한 이런저런 썰을 풀어보았다. AI를 향한 우리네 본능적인 혐오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 근거 없는 혐오를 투출하는 것이야말로, 멀지 않은 미래에 다가올 기본소득(을 넘어 기본서비스)에 대한 우리네 지분을 늘려줄 방책이겠다. 안 하면 뭐 그냥 로봇에 대체되는 것이다. ‘AI업체는 뭐 땅 파먹고 사냐?’ 같은 비판은 똑똑하신 양반들께서 잘 처리해 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존재 파이팅이다.
- 참고서적 -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2007, 슬라보예 지젝 저)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조언(2018, 유발 하라리 저)
보통 사람들의 전쟁(2019, 앤드루 양 저)
아웃라이어(2019, 말콤 글래드웰 저)
복학왕의 사회학(2018, 최종렬 저)
슈퍼맨은 왜 미국으로 갔을까(2018, 한민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