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헬싱) 근거 없는 혐오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다
‘기계에 감성을 부여한다.’ 독일의 경제학자 클라우스 슈밥이 제창한 이래, 온갖 전문용어가 난무하며, 영 뜬구름 잡는 것만 같던 4차 산업혁명을 단박에 와닿게 해 준 말이었다. 인간의 감성을 느끼고 소통하는 수준에 이를 정도로 기계가 지능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일 텐데, 참 분야에 맞지 않게 참 서정적이었다.
‘4차 산업혁명’이란 거대한 화두가 기존 산업의 패러다임을 디지털로 갈아엎는 ‘디지털 전환’, 갈아엎었으니 성과 내놓으라는 ‘디지털 혁신’으로 연신 내달렸다가, 이젠 디지털에 물리적 외관까지 덧씌우겠다는 ‘피지컬 AI’로 치닫는 걸 보노라면, 이 분야의 숨 가쁜 질주가 생생히 느껴진다. ‘4차 산업혁명’이란 말조차 구닥다리 같게 하니.
세상이 급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는데, 한켠에선 과연 이게 ‘4차 산업혁명이 맞느냐’라는 불충한 발언을 일삼는 이들 또한 있다. 경제학자 제레미 리프킨은 3차 산업혁명은 있어도 4차 산업혁명은 없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우리가 4차 산업혁명이라고 외치는 게 사실은 3차 산업혁명의 결과라는 것.
증기기관의 등장으로 시작된 산업혁명이 전기의 발견으로 다시 한번 방아쇠를 당겼을 때, 그 효과가 나타나기까지는 대략 70여 년이 걸렸다. 중공업 중심의 산업 전환을 꾀해도, 기존 방식에 익숙해진 경제 주체들이 기술혁신을 지연시켰기 때문이다. 멀리 갈 거 없다. 지금도 IT를 못 받아들여 제조업의 디지털 전환이 더디지 않은가.
단순한 계산으로 2차 산업혁명이 달성되는 데 70여 년이 걸렸으니 3차 산업혁명 또한 적어도 그 정도의 기간을 감안하고 있어야 할 것인데, 3차 산업혁명이 시작한 시기가 대략 1970년대다. 그래서 지금에 이르러서야 오히려 3차 산업혁명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아예 지금은 2차 산업혁명이라는 불충을 넘어 모반을 꾀하는 신박한 주장도 있다. 1~3차 산업혁명이 제조업 중심의 생산혁명이라면, 4차 산업혁명은 전 산업 분야에 걸쳐 일어나는 소비혁명이라는 것이다. 한쪽이 4차 산업혁명을 무시한다면, 한쪽은 강조하는 게 극단적인 좌, 우를 보여주는 듯하니, 클라우스 슈밥의 4차 산업혁명 정도는 합리적 중도 보수라 할 수 있겠다(...).
먼 나라 이야기, 그네들만의 리그로 치부할 건 아니겠다. 당장 내 손의 갤럭시 S25에 탑재된 구글의 AI ‘제미나이’는 ‘한번도 안 써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써본 사람은 없다’를 몸소 보여주겠다는 듯, 명량해전에서 왜선을 무자비하게 폭침하던 이순신 장군님의 장군선만큼의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그 퍼포먼스를 몇 번 겪어보면, 어느샌가 검색에 앞서 일단 제미나이에게 묻고 있는 나를 본다.
이번 이야기는 4차 산업혁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AI에 대한 이야기다. AI에 대한 전문적인 건 그 분야의 기라성 같은 분들에게 맡기고, ‘과연 인간이 기계와 구별되는 고유하는 본질은 무엇일까’를 시작하여, AI에 얽힌 이런저런 잡소리를 엮어본다. 그리고 그 잡소리는 내가 바라마지 않는 영화 ‘매트릭스’ 속 인간의 모습으로 수렴한다. 빨간 약 안 먹어. 안 먹는다고! 기계의 인간 사육이 아니다. ‘디지털 코쿠닝’이다.
드라큘라 백작과 로마 교황청의 이단심문관, 독일 제3제국의 흡혈귀 잔당 간의 격돌을 하드보일드하게 그려낸 일본의 현대판타지 만화 ‘헬싱’이 있다. 이 놈이고 저 놈이고, 눈앞에 보이는 적들은 노빠꾸로 썰어대는 간지폭풍들의 집합소라 할 만한데, 가장 인상 깊었던 캐릭터는 주인공 아카드(드라큘라 백작)도, 그의 대적인 바티칸의 알렉산더 안데르센도 아닌, 독일 제3제국 흡혈귀 잔당의 리더, 뚱땡이 ‘소령’이다.
하나의 인간으로만 본다면 ‘소령’은 지극히 볼품없는 남자다. 독일 무장친위대 출신임에도 총 하나 제대로 쏘질 못하는 게, 키는 작고 배는 툭 튀어나와 소령이란 타이틀이 없었다면 어디 동네에서 백주대낮부터 술 퍼마시고 있을 동네 찐따 아저씨다. 거기에 눈빛이나 말하는 건 또 살짝 맛탱이가 가 있어, 일단 마음의 거리를 풀로 벌려놓고 마주해야 할 거 같은 그런 느낌 아닌 느낌의 인물.
그런 인물, 누구나 찐따로 무시할 법한 인물이 오직 광기 어린 집념과 모략만으로 군세를 긁어모아 수십 만의 생명을 삼킨 불멸의 존재 아카드와 견주려 내달리는 건 그야말로 상남자 그 자체. 특히 “제군들, 나는 전쟁이 좋다”로 시작하는 영국 본토 침공 직전의 연설은 이놈이 얼마나 미친놈인지, 그리고 미친놈이 칼을 잡았을 때 어떤 참사가 벌어질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전주곡의 백미라 하겠다.
다만, 여기까지만이면 이 ‘소령’은 그저 카리스마 쩌는 S급 악당에 불과할 것이다. ‘소령’의 진면목은 그의 정체가 드러났을 때부터다. 종막에 이르러 밝혀진 그의 정체는 몸의 대부분을 기계로 바꾼 로봇. 그러나 그는 자신이 엄연히 인간임을 피력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건 단 한 가지 ‘자신의 의지’ 뿐이니, 설령 거대한 전산기의 기억회로가 내 전부라 해도, 나는 ‘인간’이다.
아니, 난 인간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건 단 한 가지. 자신의 의지야! (...) 나는 내 의지가 있는 한, 설령 유리병에 담긴 배양액 속에 있는 뇌수가 내 전부라 해도, 거대한 전산기의 기억회로가 내 전부라 해도, 난 인간이다. 인간은 혼의, 마음의, 의지의 생물체야. (...) 나는 나다. 나는 너와 다르다. 이 세계 모든 전쟁의 시작은 단지 이것뿐이지.
- 만화 ‘헬싱’, 죽어가는 ‘소령’의 외침
과거 아카드마저 받아들였던 흡혈귀로의 각성을, 그딴 건 딱 질색이라며, 머리카락 한 가닥, 피 한 방울도 모두 자기 꺼라며 꺼지라 일갈하는 모습은, 이 뚱땡이를 뚱땡이긴 하지만, 그래도 마냥 뚱땡이로만 보면 안 되는 뚱땡이였구나 라는 간지폭풍을 안긴다. 그 모습을 두고, 아카드의 주인 인테그라 헬싱은 아무리 네가 인간임을 주장해도 넌 한 마리 괴물일 뿐이라며 폄하하지만, 사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인간’에 부합하는 자라 하겠다.
슬로베니아의 유명 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을 대학교 때 접해볼 기회가 있었다. 당시에는 철학의 철자도 모르던 쌩 뉴비였던 터라, 여기서 어디까지가 지젝의 사상이고, 어디가 강사의 의견인지, 그리고 이 내용이 철학의 좌표에서 어디를 다루는 건지를 가늠할 깜냥이 안되었는데, 그래도 반년 간 참 여러모로 흥미롭고 많이 유익했다. 그중 하나가 인간과 기계 간 구별을 다루는 대목이었다.
우리는 사물의 본질에 다다를 수 없다. 예컨대, 분필이 하나 있다고 하자. 우리는 오감을 통해 원기둥이다. 하얗다. 딱딱하다. 맛은 없다 등 이 분필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정보를 취합하였을 때, 이게 ‘분필’이라 할 수 있을까. 이 정보를 취합하면 분필의 ‘본질’이 나오냐는 것이다. 아니, 우리는 ‘분필’일 수도 있다는 추정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요컨대, 사물의 본질, 대상 ‘a’는 우리의 감각으론 다다를 수 없는 무언가이며, 근원을 탐닉하고자 이런저런 시도를 해도 왜곡된 대상 ‘a’만 만들어질 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주체인 ‘나’의 본질에 다다르고자, ‘나를 생각한다’를 생각할 때, ‘나는 [나를 생각한다]를 생각한다’로 미끄러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지점이 연일 기계에게 털리고 있는 인간들의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확보케 하는 방주가 된다.
AI는, 우리가 분필이라 할 때, 하얗다, 딱딱하다 등 분필의 여러 특징을 삼키고 있는데, 언제부턴가는 인간을 대체하는 정도가 아니라 더 월등한 퍼포먼스를 보인다. 이제 AI가 인간의 존재가치에 의문을 가하는 것이다. AI는 우리보다 더 빠르고 정확한 데다, 싸고 편리하다. 최근 대두된 ‘다크 팩토리’라는 단어가 인상적이었는데, 로봇으로만 채운 공장은 밤에 불을 켤 필요가 없어 다크해진 것이다. 인건비 절감이 아주 그냥 제대로다.
이러한 급류 속에서도, 우리는 그 어떤 명확한 이유를 갖추지 못했음에도 마냥 AI를 부정한다. 분필의 모든 특징을 모아도 분필을 특정하지 못하듯, AI가 인간의 모든 기능을 가져가도, 우리의 ‘공백’만큼은 가져가지 못한다. 그러니 이 근거를 갖추지 못한 혐오, 규정되지 못한 ‘공백’이야말로, 설령 겉으로 봤을 때는 그 어떤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하등 할지라도,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본질이라 하겠다.
헬싱 속 ‘소령’을 다시 보자. ‘나는 나다, 나는 너와 다르다’ 그의 육신은 로봇이었지만, 그는 자신만의 의지를 부르짖으며, 인간임을 강변한다. ‘나’에 집착하며 수많은 혼과 뒤섞여버리는 흡혈귀로의 각성을 꺼지라 일갈하고, 구체적으로 무엇이 다른지 말할 수 없음에도, 나는 나임을 나는 너와 다르다는 걸 온몸으로 피력한다. 그 의지, 눈에 잡히지 않는 ‘나’에 천착하며 나 이외의 것은 모조리 부정하고 혐오하는 그것이야말로, ‘공백’이 촉발하는 AI를 향한 저항이자 가장 인간다운 인간의 모습이라 하겠다.
(2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