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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컬트의 서자' 타로카드로 한반도 창세여신까지 /2부

(게임 사이퍼즈) 괴베클리 테페, 삼산오악, 마고할미, 지리산 노고단

by 꿈꾸는인형


# 인간에게 요리되는 신


시선을 앞으로 쭉, 유사(有史) 이전까지 당긴 다음에 시작하자. 유사 이전의 인류는 대략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발전했다. ‘수렵채집 → 농업발견 → 정주사회 → 종교형성 → 국가등장’. 산하를 배회하며 짐승 잡고 열매나 따먹던 애들이 우연히 농사짓는 법을 알았고, 그 베네핏을 맛본 뒤론 아예 눌러 앉아버렸다. 이것은 대규모의 집단을 형성했고, 그 집단을 제어하기 위해 등장한 게 바로 종교. 한 단계 더 나간 게 바로 국가다.



오랫동안 정설로 자리 잡은 이 도식에 의문을 갖게 한 계기가 바로 터키의 ‘괴베클리 테페’다. 영국의 스톤헨지처럼 일련의 규칙에 따라 거석을 세운 이 유적지의 연대가 약 기원전 9,500년이라는 게 문제였다. 시기 상 농경문화가 들어서기 전인데, 그러면 이 유적은 수렵채집인이 세운 것이 된다. 또한 기존 견해대로라면 농경사회에 진입해야 대규모 집단이 촉발되는데, 이미 대규모 인력 동원이 가능한 사회가 존재했다는 말이 된다.



농사가 아니라면 무엇이 이걸 가능케 했을까. ‘사피엔스’는 종교가 바로 그 역할을 대신했다고 말한다. 저자 유발 하라리는 “괴베클리 테페를 건설하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 무리와 부족에 속한 수천 명의 수렵채집인을 오랫동안 협력하게 만드는 것뿐”이라며, “그런 노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세련된 종교나 이데올로기 시스템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당연하지만 당시에 이데올로기가 있을 리 만무하다.



괴베클리 테페는 또 하나의 시사점을 제시한다. 괴베클리 테페 인근에서 농경의 발원지 등이 발견된 것인데, 이렇게 되면 농경으로 촉발된 대규모 집단을 통솔하기 위해 종교가 등장한 게 아니라, 사실은 먼저 종교가 있었고, 그로 인해 등장한 조직화된 집단을 부양하기 위해 농경이 때맞춰 부상하게 된 것이다. 기존의 도식을 180도로 뒤집는 발상이 가능해진 것.



물론 아직 괴테클리 테페가 촉발한 이견을 두고, ‘그까이꺼 만드는 데 뭔 무더기로 사람을 쓰냐. 노가다 아재들로다가 좀 갖다 쓰면 금방 혀~’라는 주장도 있다 보니, 아직은 정설로 자리 잡기엔 부족한 면이 있다. 대규모 집단의 부재는 곧 종교의 필요성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종교에 대해서 조금 더 집중하려 하니 유발 하라리의 견해에 더 무게를 두면서 이야기를 풀어갈 것이다.



‘사피엔스’에 따르면, 뒤늦게 등장한 유사 이전의 농업으로 인해 종교는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초창기의 종교는 눈에 보이는 동물, 식물 등을 숭배하는 토테미즘, 거기에 깃든 정령을 믿는 애니미즘 등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상이 농부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곡식과 가축은 수확하고 도살해야 하는데, 어떻게 그걸 숭배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정령들은 신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고, 자연은 농부들의 소유물로 전락하게 되었다. 괜히 농자 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침 집단의 규모가 커져 하나의 국가로까지 확장되었고, 신 또한 대규모 업데이트를 맞이하게 되었다.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는 정령 대신 ‘하늘과 천둥의 신’, ‘대지와 풍요의 여신’ 등 세상을 아우르는 추상화된 신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저자 조현설)에 따르면, 비슷한 대목이 있다. 신화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시조신화, 다른 하나는 건국신화다. 시조신화는 인간의 조상을 동물에서 찾는데, 그 종류는 곰, 백조 등 다양하다. 우리 단군신화를 볼 때, 곰과 호랑이를 곰을 숭배하는 집단과 호랑이를 따르는 집단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달리 말하면, 곰 시조신화를 가진 집단과 호랑이 시조신화를 가진 집단 간 대립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집단들의 사냥은 우리네의 사냥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만주의 소수민족 니브히 족에겐 ‘곰 넋 보내기’라는 제의가 있는데, 곰 하나를 잡는 데 있어, 사람처럼 지극정성으로 대우하고 보살펴준 뒤, 곰을 죽인다. 지극히 쓸데없는 짓으로 여겨지는 이 행위는 단순히 곰을 사냥감으로만 인식하는 우리네와는 다르게, 이들에게 곰은 우리에게 동등한 친구이자 존중해야 할 존재로 여기고 있음을 시사한다.



고도화된 사회는 이내 타 집단과의 분쟁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아귀다툼 속에서 우열이 가리어지게 될 것이고, 자연스레 시조신화는 한계를 맞이하게 된다. 모두가 가지고 있는 시조신화를 누를 만한 한 단계 높은 신화가 필요해진 것이다. 지상의 모든 동물 등을 찍어누르고, 각 지역까지 포괄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에 대한 갈구.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게 바로 ‘하늘’이었다.



그래서 고대 국가의 건국 군주들의 혈통이 ‘내 아버지는 하늘의 아들 어쩌고 저쩌고’하는 식으로 작성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건국 군주 하나에게 모두가 복종하게 되는 시스템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이 과정 속에서 시조신화의 동물들은 신화의 주변부로 밀려나게 된다. ‘사피엔스’의 최강 직업군, 농부가 정령을 짓밟고, 동식물들을 사물로 격하시킨 것처럼 이제 곰 하나 잡을 때 지극정성일 필요가 없다.



옛 제주도, ‘탁라국’ 또한 좋은 사례라 하겠다. 먼 옛날부터 한반도에게 지속적으로 얻어터졌던 그네들의 신화에서 창업군주들은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삼성혈’로 흔히 알려진 ‘땅굴’에서 올라오며, 건국 또한 바다 건너 공주를 만난 뒤에 이루어진다. 함부로 ‘하늘’을 끌어왔다간 한반도에게 떼찌떼찌를 당할지도 모를 일이 있었으니, 자의든 타의든 스스로의 가치를 낮춰야 했을 것이다.



‘신이 된 인간들’(저자 박정원)에 따르면, 신화의 가장자리로 밀려난 이들이 좌정하는 곳이 바로 ‘산신’이다. 이 ‘산신’은 민물과 해수가 만나는 일종의 접경지와 같은데, 신화의 중심부에 밀려난 구시대 신들 외에 격을 높여 신의 자리까지 다다른 창업군주, 비극적인 끝을 맞이한 영웅 등등 작금의 신과 동급으로 놓기는 좀 거시기한데, 그렇다고 대접은 안 할 수 없는 이들을 그냥 모아놓고 퉁친 그런 느낌이 좀 있다.



산신신앙이 국가의 주도로 체계적으로 정비된 건 통일신라 문무왕 때였다. 마침 문무왕도 고구려, 백제를 신라와 융화시키기 위한 정신교육이 필요했던 터였다. 원효와는 달리 당나라 유학 가서 석박사 따고 온 의상으로 하여금 화엄종을 전파케 하였고, 산신신앙은 그 어용불교(...) 화엄종에 적절히 융합되며, 삼산오악 체계로 정비됐다. 바람 쐬러 한번씩 사찰에 가면 그 뒤편에 자리한 산신각과 칠성각 등이 보일 텐데, 그게 이 흔적이다.



단일의 호국신앙으로 이질성을 극복하려 한 ‘삼산오악’은 경주를 중심으로 한 호국적 성격의 대사 삼산, 통일신라의 방위거점 역할의 중사 오악, 국가통합을 위해 산신신앙을 망라한 소사로 나뉘어 산신들을 좌정시켰다. 크고 작은 변천을 거치긴 했는데 산신들의 면면을 보면, 신라 석탈해, 김유신 외에 당나라 설인귀(형은 왜 여기에?), 고려 왕건의 6대조인 개성 호족 호경, 조선 단종 등 각양각색을 넘어 잡탕의 느낌을 진하게 준다.



장강의 앞물결이 뒷물결에 쓸려가듯, 언제나 꾸준히 약동하는 신화 속에서 자신만의 서사를 가진 이들이 서서히 산신에 유입되었다. 고대시대 뿐만 아니라, 고려 왕건의 6대조, 조선 단종 등이 산신에 좌정한 건 그런 맥락이다. 그런데 그런 그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고 보면 그 끝엔 무엇이 있을까. 거기엔 우리나라 단군에게 치여 비주류로 밀려나버렸지만, 여전히 무속신앙 속에서 살아 숨쉬는 태초의 여신들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계사회의 흔적은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특히 실체가 없는 산신에 여신이 좌정했다는 구체적 사례는 매우 많다.”라며, “단군이 나라를 다스린 뒤 산신이 됐다는 건국신화 이후 모계 중심인 원시사회에서는 여산신이 일제히 좌정한다. 그 여산신이 누구인지 실체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 ‘신이 된 인간들’, 속리산은 전형적 여성 산신



‘심리학이 만난 우리 신화’는 우리나라 창세여신으로 마고할미를 거론했다. 저자 이나미에 따르면, 마고할미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약간 다른 내용, 다른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설문대할망’(주. 한반도의 마고와 구분하기도 한다)이라고 전해지고 있고 전남이나 해남 지역에서는 ‘마고할미’라고 전해진다. 서해안 지방에서는 ‘계양할미’. 강원도에서는 ‘서구할미’, 경상도에서는 ‘안가닥 할미’라고 불린다.



초창기, 그러니까 수렵채취를 할 때의 인간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뭉치는 모계사회일 수밖에 없다. 지금과 같은 결혼 제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 씨가 어떤 놈팡이의 것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확실히 부모로 증빙이 되는 건 엄마뿐이었으니까. 거기다 당시 남자들은 사냥 나갔다가 언제 호랑이한테 한입거리가 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들이 그 집단에서 무게중심을 이룰 수 있었겠나.



그러니, 시조신화, 그리고 그에 따른 초창기 창세신화 속 주인공은 여성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대시대의 서양에서도 창세신이 여성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제법 된다는데, 이나미 박사는 “중동의 여신 티아마트, 켈트족의 메이브 여신들이 그 예이다.”라며,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고대 이집트에서는 정반대의 의미로 쓰였다. 남자가 땅에 누워 있고 여자가 하늘로 받들어지는 그림도 흥미롭다.”라고 말했다.



다만,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전환되는 과정 속에서 창세여신의 위상은 깎여나갔다. 극단적인 케이스가 강원도의 서구할미인데, 여기는 이제 주술을 부리며 사람들을 헤치는 마귀할멈 수준으로 영락하게 된다. 그래도 한때는 산신이었을 서구할미가 이리된 건 무속신앙을 배격하던 조선의 유교논리 등이 있었을 것이다. 마귀를 때려잡는데 필요한 건 신의 축복을 받은 칼과 방패, 부적이어야 할진대, ‘효자’ 타이틀이 웬 말인가.



취병산 서쪽 백월산 중턱 바위굴에 서구할미가 살았는데 어린애들을 홍역 같은 병에 걸려 죽게 했다. 요염한 여인의 모습으로 변신해 남자들을 홀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재물을 바치지 않으면 해도 입혔다. 생김새도 산발에 낚시코에, 손톱은 기다랗고 앙상했다. 나라에서도 어쩌지 못했는데 효자인 최아무개가 머리에 쑥뜸을 뜨자 “효자가 벌을 주니 달게 받겠다”라고 하면서 며칠 만에 죽었다고 한다.
- ‘삼척군지’, 강원도 서구암에 얽힌 설화



제주도의 설문대할망은 창세여신답게 상당히 ‘크고 아름다운’ 풍채에 넘사벽의 클라스를 자랑했는데, 이와는 별개로 그 행보에 있어선 영 모양새가 좋지 않다. ▲제주도 전역을 빚었는데도, 자기 입을 속옷 100벌 중 하나가 부족해서 제주도와 본토를 잇는데 실패하질 않나, ▲그 높은 키를 자랑하려고 틈만 나면 물속에 들어갔다가 하필이면 밑이 빠진(...) 한라산 물장오리에 들어가 사망하셨다든가...



뭐, 사실은 죽은 게 아니라 제주도와 한 몸이 되었다, 다리 놓기를 거부한 여신이 제주 섬이 된 거다 등의 해석이 있긴 한데, 썩 와닿진 않는다. 그것보단 앞서 다뤘던 제주도 건국신화와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해보는 게 와닿는다. 제주도의 건국군주가 그 가치를 격하당했던 것처럼 창세여신이었던 설문대할망 또한 어찌 됐건 제주도에 속한 이상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게 아니면, 창세여신 즉 ‘어머니’ 여신은 이제 ‘아버지 신의 서브 역할로만 자리한다. ‘연오랑과 세오녀’에서 세오녀의 길쌈은 창조여신의 흔적으로 해석된다. 아주 옛날에는, 시장경제도 활성화되지 않았을 테니, 옷이라는 게 다 어머니들이 집에서 직접 베틀에 앉아 옷감을 짜고 그걸로 가족들의 옷을 입히는 식이지 않았겠는가. 그러니 여신의 창조를 형상화하는 데 있어, 옷감짜기만 한 것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길쌈, 창조여신의 주요 스킬로 평가되는 이 ‘옷 만들기’는 유감스럽게도 ‘제 옷’을 가지려는 경우엔 설문대할망처럼 실패로 끝난다. 성공하는 건, 남편의 옷을 만드는 경우뿐.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는 ‘여신의 주변화’ 때문이라고 답한다. 고대국가 이후 여신들은 현실을 반영하여 대부분 남신의 배필이나 딸로 위계가 조정되었고, 그래서 달의 여신 세오녀 또한 딱 태양의 신 연오랑을 부각시키는 정도까지만 나오는 것이다.



유감스러운 케이스를 더 보자면, 산신으로 밀려난 것도 서러운데, 인간에 불과한 왕의 엄마한테까지 밀려나는 경우다. 본디 지리산은 노고단을 중심으로 신앙이 형성되어 있었고, 여기엔 ‘노고할미’가 산신으로 좌정하고 있었다. 노고할미 역시 두 산 사이에 발을 걸치고 쉬야를 하시면 그 사이 고개의 큰 바위들이 깨져나갈 정도로 ‘크고 아름다운’ 풍채를 자랑하셨다. 마고할미의 일종이다.



고려는 건국신화를 통한 ‘초격차’, 왕가 신성화 작업에 열중했는데, 그 일환으로 왕건 할아버지는 중국 당나라 핏줄로 만들고, 할머니는 용왕의 딸, 즉 용녀(...)로 만들었다. 다만 그걸론 엣지가 없다고 여겼는지 제 엄마 위숙왕후 또한 지리산 산신으로 만드는 기염을 토했다. 개성에서 큰 뜻을 펼쳤으면 본인들의 아이덴티티를 위해 송악산에 모셔야지란 의문이 들 법한데, 이미 6대조인 호경이 송악산 산신과 결혼하여 찜콩했다(...).



사실 지리산은 이미 통일신라 때부터 산신신앙의 주요 거점으로 다뤄졌다. ▲오악 중 하나인 ‘남악’으로 지칭되었고,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선도성모를 경주 선도산에서 옮겨 모시는 등 매우 공을 들였다. 고려 왕가가 왕건 어머니를 모실 만한 급이 되는 네임드 명산이었던 것. 그리고 그 결과, 이미 신라 선도성모와 뒤섞였던 노고할미는 더 큰 떼찌떼찌(...)를 맞이하게 되었다.



지리산 천왕봉에 왕건의 어머니가 모셔짐에 따라 산신제 또한 아예 노고단에서 성모사로 옮겨지게 되었다. 고려는 또한 불교가 국교였으니, 불교적인 색채 또한 더욱 강해지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왕건의 어머니였던 ‘성모’는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의 이미지를 걸치게 된다. ‘신이 된 인간들’에 따르면, 이때부터 고려 시대부터 노고와 성모는 구분되어 천왕봉 계열의 산신과 노고단 계열의 산신 두 계파로 나뉘게 되었다고 한다. 지리산에 산신은 하나일진대, 이름이 참 많기도 하다.



# 거인의 어깨 위에서


신으로만 ‘나’를 규정할 수 있었던 중세가 저문 이후, 이성으로써 ‘나’를 바로 세우는 근대를 겪으며 이제 종교는 우리에게 선택을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아무리 ‘신 따윈 없어!’를 외치며 신을 믿지 않아도, 여전히 우린 신의 그늘 속에 있다.



르네상스로 꽃피기 시작한 이 인본주의는 크게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로 나뉘는데,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이 모두가 기독교 등으로 위시되는 일신론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본성에 대한 믿음을 근간으로 하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는 만약 자유롭고 영원한 개인의 영혼을 믿었던 기독교에서 연원을 찾지 않으면 인간이 다른 생명에 비해 무엇이 더 특별한지를 설명하기가 어려워진다.



개개인이 아닌 하나의 집단으로서 ‘인간’을 중시하는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개인의 행복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평등을 추구한다. 불평등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가장 큰 모독인데, 이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건 모든 영혼이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믿음의 확장이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가 우파라면, 이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지극히 좌파라 하겠다. 좌우라는 게 사실은 신의 좌우였던 것이다.



이 프레임, 일신론의 속박을 벗어난 유일한 인본주의가 있는데, 진화론적 인본주의로 대표적인 예가 ‘나치’(...)다. 이쪽은 인간의 존엄을 신학적 믿음에서 끌어온 게 아니라 생물학적 진화에서 뽑아온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지만, 언제든 퇴화할 수 있으니, 좋은 학군에 가서 좋은 애들과 교류하며 더 나아지길 누구나 바라듯, 나치도 우월한 종들끼리만 엮어 보다 나은 인류를 만들어내려 했다는 게 아주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아니다.



‘다윈의 진화론’이란 위대한 업적이, 신과 거리를 두며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게, ▲유대인을 대량학살한 독일의 ‘나치즘’, ▲‘조선은 일본보다 미개해’라며 독립운동가들이 라인을 갈아탈 명분을 준 ‘사회진화론’이라는 걸 보노라면, 그냥 신의 품에 머무는 게 나은 듯싶다. 다만, 그 신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선 이제 취향의 문제. 그러니 그 모습을 스케치해 볼 때, 우리네 빛바랜 창세여신에 대한 흔적을 더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지금까지 고시생 짠테크 취미생활로 포문을 열어 본 타로카드 잡설에서 우리네 창세여신의 흔적에 대한 이야기까지 쭉 달려보았다. 오컬트라든지, 종교나 신화라든지 다 주류가 있고 비주류가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주류에 있던 것들이 비주류로 밀려나기도 하고, 주류에 있던 것들이 천지개벽하듯 뒤집히기도 한다. 다만, 뒤집히는 건 극히 드문 일이고, 물결처럼 밀려나는 게 보통일 것이다.



종종 그 물결처럼 밀려난 것들을 헤집다 보면, 생각보다 유익하고 배우는 것들이 많다. 언제 동성애로 고민하는 이들의 속사정을 들어보며 이해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언제 ‘아버지’ 신들의 이야기에 묻혀버린 ‘어머니’ 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것이며, 언제 인간에게마저 요리되는 구시대 신들의 애잔함을 느껴볼 수 있겠는가. 비주류를 본다는 건 그런 달콤 씁쓸한 매력이 있다.



- 참고서적 -

타로카드 매트릭스(2019, 장재웅 저)

타로카드 비밀의 문(2016, 신종민 저)

더 타로북(2020, 한연 저)

사피엔스(2023, 유발 하라리 저)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2006, 조현설 저)

신이 된 인간들(2018, 박정원 저)

심리학이 만난 우리 신화(2016, 이나미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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