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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TP Jan 11. 2024

'나는 용손이다' 고려 용손의식에 감춰진 중국 사대주의

단군신화로 시작된 한반도 신화의 변화양상


# 뭐든지 늦바람이 무섭다


자기가 세운 고려를 지키기 위해 다시 강감찬으로 돌아온 최수종 형님의 ‘고려거란전쟁’이 화제다. 오랜만에 나온 정통사극이 반가워 아껴놨다가 정주행 하려고 했는데, 워낙 호평이 가득하여 참지 못하고 시동을 걸었다. ‘태종 이방원’으로 눈높이가 아주 그냥 안드로메다를 찍을 기세였는데도, 참 재밌다.

 


뒤늦게 춤에 맛 들리신 분들이, 동네를 주름잡는 한 마리 댄싱야수가 되어버리듯, 뭐든 늦바람은 무섭다. 남들보다 늦었다는 걸 만회하겠다는 듯, 명장면, 명대사 등 온갖 2차 창작물들을 연거푸 리플레이하며 주접을 떨어도 그냥 좋았는데, '아 이래서 어머니들이 임영웅 콘서트예매에 성공하면 눈물을 흘리시는구나'를 공감할 수 있었다.


 

‘남들 다 만드는 2차 창작물, 나는 못 만들 건 뭐야’라는 일념으로 이리 쿵 저리 짝 들이밀다 보니, 몇 가지가 눈에 보였다. 옛날에는 이때 아니면 언제 개드립을 적어보겠냐며 망나니 마냥 펜을 돌렸는데, 나이 먹고도 계속 그러면 주접이 되는 만큼, 짧고 굵게 끊어쳐보고자 한다. 될까 모르겠지만.



2024년 갑진년은 청룡의 해이니 만큼, ‘나는 용의 후손이다!’라고 고려 목종과 현종이 걸핏하면 부르짖던 고려 왕실의 용손의식을 이번 이야기에서 다룬다. 우리나라 단군신화를 시작으로 한반도 신화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하는데, 이 사이에 슬쩍 중국 사대주의가 끼어드는 부분을 조명해 보는 게 핵심포인트.




 

# 하늘 아래 곰과 호랑이


신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시조신화와 건국신화인데, 시조신화는 씨족 공동체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건국신화는 나라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럼 두 신화 중 무엇이 더 빠를까? 무엇이 더 근본에 가까운 것일까? 간단하다. 씨족이 우선이었는지, 국가가 우선이었는지를 생각해보면 된다. 시조신화다.


 

보통 시조신화는 동물을 자기네들의 조상으로 삼는다. 주변에 가장 흔한 게 동물이기도 했고, ‘우리는 저 산 너머에서 살다가 산 좋고 물 좋다길래 넘어왔어’보단 ‘우리는 호랑이의 후손이다’라는 게 더 옆 부족하고 싸울 때도 더 뽀대 나지 않겠는가.

 


만약 특정 시조신화가 이런 시조신화를 갖춘 여러 개의 부족들을 찍어 눌러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시조신화보다 상위에 좌정시킬 수 있는 신화여야 하는데, 동물들보다 위에 있다는 걸 한눈에 보여주는 게 뭘까? 바로 하늘이다. 그래서 건국신화는 보통 하늘에서 시조가 내려와 땅의 동물들을 지배하는 구조를 가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단군신화를 보면, 특정 부족이 여러 부족을 흡수하며 하나의 국가로 도약하는 흔적이 있다 할 것인데, 살피고 갈 게 있다. 보통 우리가 떠올리는 웅녀가 단군을 낳았다는 단군신화는 삼국유사의 것인데, 또 다른 단군신화가 ‘묘향산지’에 수록돼 있다. 골 때리는 건, 여기선 단군을 낳은 게 웅녀가 아니라 호랑이다



두 신화 간 우위를 어떻게 가려야 할까. 학계에서는 ‘묘향산지’의 단군신화가 더 오래된 것으로 친다. 왜냐하면 삼국유사는 ‘웅녀’라는 곰이 인간으로 변했다는 인격신 개념이 나오는 반면 묘향산지는 인간으로 변신 그런 거 없이 바로 호랑이가 단군을 낳았기 때문이다.


 

성경의 4대 복음 중 요한복음이 가장 고퀄로 평가받는 요인 중 하나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첫 문구인데, 이는 하나님을 인격신으로 그리지 않았음을 뜻한다. 만약 하나님이 인물로 나오면, 그 인물이 존재하는 시공간, 즉 천지는 누가 만들었느냐는 의문이 뒤따라, 그 창세신화의 격은 낮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다양한 상상을 펼칠 수 있겠다. 사실 단군을 낳은 건 호랑이 부족이었지만, 추후 곰 부족이 권력을 잡고 대폭 신화를 수정했다든지, 아니면 곰 부족에게 몰락한 호랑이 부족이 자신들의 신화를 민중들의 구전으로 힘겹게 전승시켰다든지 등. 내 취향은 전자지만, 곰 부족과 마찬가지로 호랑이 부족도 하늘과 결부된 고도화된 시조신화를 갖춘 부족이었다 정도만 챙기는 게 좋겠다.




# 호랑이 엄마의 인생역전?


스타워즈의 명대사 ‘내가 니 애비다’의 한반도 버전으로 ‘내가 니 애미다’를 시전하여, 우리나라 특유의 막장 드라마가 사실은 고조선부터 내려온 유고한 전통을 가졌다는 걸 알려주는 ‘묘향산지’ 단군신화를 굳이 가져와 본 이유는 고려의 건국신화에서 이 호랑이 엄마의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고려 왕건의 족보를 보면, ‘호경-강충-보육-진의-작제건-용건-왕건’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에 2가지 신화가 붙어있다. 6대조 호경에게 하나, 할아버지 작제건에게 하나. 작제건의 이야기는 뒤로 하고, 우선 6대조 호경의 이야기를 먼저 해보자. 호경의 와이프가 바로 호랑이 엄마, 여산신이다.




 호경은 사람들과 평나산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날이 저물어 굴에서 자던 중 호랑이 한 마리가 굴에 나타났다. 호경은 싸우려 나갔고, 때마침 동굴이 무너져 오히려 동굴 속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게 되었다. 호경이 산신에게 제사를 올렸는데, 자칭 평나산 주인이라고 하는 과부 여산신이 나타났다. 신화에 따르면, 이 과부 여산신이 바로 굴을 막고 으르렁거리던 호랑이였다고 한다. 그 광경을 본 고을 사람들이 호경을 산의 대왕으로 모셨다고 한다.
- 호경신화

 


한 부족의 창세신화를 담당했던 시조신들이 밀려나면 어떻게 될까. 아랫 단계의 신들로 하나씩 격하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격하의 정도는 가중된다. 보통 시조신들은 여신들이 많은데, 마고할미처럼 어느 정도 급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이들은 점차 산신과 신선으로 밀려난다.

 


물론 최수종 형님의 6대조께서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도 닦다가 진짜 산신으로 레벨업한 호랑이와 연을 맺었을 수도 있겠다만, 실질적으로 고려 창업군주 왕건의 선조가 호랑이 신앙을 갖고 있던 유력집안과 결합했다고 보는 게 더 현실적이다.



호랑이 집안은 곰한테 털려서 역사는 깊은데 겔겔거리고 있었으니, 고려사 등 여러 기록에서 매우 부유했다고 전해지는 호경과 손을 잡고 힘을 키워보고 싶었을 수 있겠다. 호경이 스스로를 ‘성골장군’이라 칭했다는데, 돈 많으신 분들이 이름 앞에 직함 하나 다는 건 다 비슷비슷하지 않을까.


 

어찌 보면 호랑이 집안으로선 모냥 빠지는 것일 수도 있겠다. 웅녀는 시조신이었다가 하늘의 아들 ‘환웅’의 와이프가 되었는데, 호랑이는 산신으로 있다가 졸부 ‘호경’의 와이프가 되었으니, 뭔가 클라스가 좀 저렴하지 않은가. 그래도 이 베팅은 성공했다. 호경이 아니고, 그 자식 놈도 아니고 저기 좀 많이 내려가긴 하는데, 그래도 결국 나라 세우기의 달인 최수종 형님이 나오니까.


 


# 용한테 밀린 호랑이, 중국은 하늘과 같아?!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호랑이의 ‘왕좌의 게임’은 최수종 형님의 할아버지 작제건에 이르러 새롭게 변주된다. 이젠 세상 속에 있는 동물들로는 약발이 떨어졌는지 환상 속 존재가 등장하는데, 바로 ‘용’이다.



당나라의 황제가 잠저 시에 송악의 보육 가에 와 묵게 되었다. 둘째 딸 ’진의‘와 인연이 되어 동침하고 작제건을 낳았다. 작제건이 장성한 다음 아버지를 찾아 신물(信物)인 신궁(神弓)을 가지고 당나라 상선을 탔다. 풍랑을 만나 점을 치니 고려인을 섬에 내려놓으라 하였다. 작제건이 섬에 내리니, 자신을 서해 용왕이라 칭하는 노인이 나타나 늙은 여우가 나타나 쏘아 달라 청하였다. 늙은 여우를 쏘아 죽이니 용왕은 용궁으로 초청하였고, 용녀를 아내로 삼았다.
 - 작제건 설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이 싶으면 그게 맞다. 사실 고려까지 오면 온갖 괴력난신들이 난립하는 신화가 이미 숱하게 있을 때였고, 고려 왕가 입장에선 적당히 뽀대 나는 것들을 뽑아다가 짜깁기하면 되니까. 식상함은 그러려니 하고, 몇 가지 포인트만 짚어보자.


 

용의 순우리말은 ‘미르’인데, ‘물’과 어원이 같다. 벼농사에는 물이 중요한 만큼 용은 이미 벼농사가 활발한 지역에서 수신으로 숭배되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벼농사가 활성화됨에 따라, 용신 신앙이 전국구 클라스로 발돋움하게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본격적으로 중국과의 접점을 만들어, 정치적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한다는 것. 고구려가 쓸려나간 이후 당시의 동아시아에서 더 이상 중국의 위상에 견줄만한 나라는 마땅히 없었으니, 가히 중국 중심의 세계관이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호랑이는 이제 무대에서 밀려난다. 호랑이가 명함을 내밀기엔 할머니는 용의 딸이고, 할아버지는 당나라 숙종의 아들이다. 중국은 이제 호랑이쯤은 맞다이 깔 수 있는 신성불가침이 되었다. 뭔가 개족보인 듯 개족보 아닌 개족보 같은 느낌이지만, 그냥 그런갑다 해보자. 정치테마주는 뭐든지 수익률 폭증했을 때 먹고 나와야지 묵히면 망하는 법인데, 호랑이는 그걸 몰랐다.




# 중국, 용과 겸상하나요?


우리가 역사를 배울 때, 고려는 외왕내제를 취했다고 한다. 대외적으로는 국왕이지만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칭하는 이중체제를 뜻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고려 용손으로 표상되는 국가적 자존감을 들춰보면, 은근슬쩍 중국 사대주의에 발을 걸치고 있다. 황제 위의 황제라니, 옥상옥도 클라스가 남다르다.


 

어느 정도의 여지는 있겠다. 중국에게서 정통성을 끌어오려는 시도가 본격화된 건 고려 김부식이 활동했을 때부터다. 김부식 이전에는, 다시 말해 고려거란전쟁이 주무대인 현종 시대에는 중국 사대주의가 없었을 여지도 있겠다. 물론 이때에도 사대주의가 지배층 의식 저변에 확고히 깔려 있을 가능성도 있다.


 

지금까지 단군신화부터 작제건 설화까지 신화적인 측면에서 고려의 용손의식을 조명해보았다. 웅녀한테 털린 호랑이가 호경이라는 테마주에 손대었다가 매도 타이밍 잘 못 잡고 폭망하는 과정을 보았고, 이 과정에서 환웅이라는 하늘이 중국이라는 새로운 하늘로 대체되는 것도 보았다. 각 이야기에서의 호랑이를 하나로 엮는 건 어찌보면 단락적이고 위험하지만, 뭐 재밌으면 된 거다.


 

새해를 맞아 새롭게 소통할 수 있는 재밌는 거 한번 써보자 해서 썼는데, 쓰고 보니 과연 이걸 누가 재밌다고 읽을까 싶다. 역시 오타쿠는 어둠 속에서 놀아야 하는 법인가 싶다가도 어쨌든 재밌어 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좋겠다.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 신화가 소소한 힐링이 되었기를 바라며. 강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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