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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영화로 쌓아 올리는 블록놀이

by 꿈꾸는인형


'귀멸의 칼날', '체인소맨' 등 여러 애니메이션을 즐기다 보면, 어느 순간 캐릭터의 목소리를 연기하는 성우에게 관심이 가게 된다. 내가 푹 빠졌던 캐릭터의 목소리를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듣게 되었을 때의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보고 있던 애니뿐만 아니라 그 성우가 참여했던 모든 애니까지 찾아 섭렵케 하는 계기가 된다. 소위 '성우 덕질'이라는 걸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만화 '헬싱'에서 주인공 아카드 역을 맡았던 '나카타 죠지' 성우를 좋아한다. 그 특유의 굵직하고 무게감 있는 저음은 아카드처럼 잔혹한 안티히어로가 아니면,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에 제격이다. 그러다 보니 성우의 커리어 또한 악역이 상당수 채워졌는데, 그 화려한 목록에 '개구리 중사 케로로'의 기로로 하사, '지구방위대 후뢰시맨'의 사 카우라(원래 배우였음)가 있는 게 개그 포인트.



우리나라도 '배우 개그'라고, 이런 포인트를 찾을 수 있다. 최수종 배우가 대표적인데, 워낙 걸출한 사극에 두루 출연하신 나머지, 삼국통일도 한 것(태종 무열왕)도 모자라 고려도 세우고(왕건), 발해도 건국하다가(대조영), 이제 나라 세우기는 지겨워졌는지 청해진을 만들고(장보고) 사상의학으로 한의학도 재편해 봤다가(이제마). 얼마 전엔 자기가 세운 고려를 지키려고 귀주대첩을 벌였다(강감찬).



이렇게 제각각의 영역들이 하나의 주제로 엮이고 정돈될 때, 나는 즐거웠다. 이 책도 결국엔 이 즐거움의 연장선이다. 인상 깊었던 만화와 영화, 드라마 등을 코드로 하여, 유사하거나 어울리는 책들을 이리저리 끼우고 붙여보았다. 아주 쌩뚱맞아 보이는 것들을 더할 땐 혼자 신나서 웃어댔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블록을 쌓아 올리듯 천천히 글을 붙여가다 보면, 나름 마음에 드는 게 하나씩 나왔다.



그때그때 끌리는 화두를 잡아 쓰다 보니, 이게 하나로 정돈이 될까 싶었지만 어떻게 정리가 됐다. 총 4개의 챕터인데, 첫 번째 챕터는 '신과 신화'를 다루다 보니, '신만이 아는 세계'(2010년)라 이름 지었다. 미연시 게임 전문 오타쿠가 현실에서 미소녀들을 하나하나 게임하듯 공략해 나간다는 골 때리는 설정의 애니메이션이다. 오타쿠가 신화를 다루는 파트에 딱 맞지 않나.



두 번째 챕터는 '꽃이 피는 이로하'(2011년)다. 일본의 온천여관을 배경으로 소녀의 분투기를 다룬 애니인데, 결론적으로 끝내 여관은 문을 닫아 '영웅의 쇠락과 한계', '왕가의 절멸'을 다룬 챕터와 잘 맞았다. 세 번째 챕터는 '츠바사 크로니클'(2005년). 카드캡터 체리로 유명한 CLAMP가 하나의 세계관으로 제 작품들을 집대성한 만화로, 이야기 속 별개의 이야기들이 특징이다. '고려와 일본'의 독립된 이야기묶음인 여기와 어울렸다.



부록인 네 번째 챕터명은 '그대가 바라는 영원'(2003)이다. 불의의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던 첫사랑이 수년이 지나고 눈을 떴다.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만을 가진 채로, 지금의 주인공은 겨우 상처에서 벗어나 그동안 자신을 살펴줬던 첫사랑의 친구였던 여자와 결혼하려던 순간에. '사랑'을 주제로 '극한의 판단'을 해야 한다는 설정이 '연애와 결혼', '담배권 허가'를 다룬 내용과 괜찮아 보였다. ...아님 말고.



한때 'T형 인재'라는 말이 유행처럼 나돌았다. 전공은 깊이 있게 갖추되, 교양도 폭넓게 갖춘 인재가 이 시대가 원하는 인재상이라는 건데, 애초에 나는 글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전문가는 멋지지라는 선망은 한결같지만, 어디까지나 내 희망사항일 뿐이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이것저것 아는 것만 얇게 쌓여갈 뿐, 전문직들처럼 자신만의 시각으로 끝없이 파고들어 갈 역량은 없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줏대 없이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세태를 비웃는 말이겠지만, 나는 참 멋진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장신구가 여기저기에서 다양한 쓰임을 만들어 냈다는 말 아닌가. 이 브런치북 또한 추구하는 바도 그와 같다. 그 장신구를 완벽하게 소화하진 못하더라도, 여기저기에 붙여 재밌게 하는 것. 이것이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제네럴리스트가 꿈꿀 수 있는 이상향일 것이다.



때때로 잡스러워 보이겠지만, 마냥 잡스럽지 않도록 나름 열심히 했다. 모쪼록 재밌게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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