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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AI여, 오타쿠의 신화가 되어라 /2부

(애니 취성의 가르간티아) 자율주행차, 기본소득, 제2차 러다이트운동

by 꿈꾸는인형


# 기계... 너란 남자, 나쁜 남자


‘취성의 가르간티아’라는 2013년에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이 있다. 취성(翠星)은 푸른 별이란 뜻으로 표면의 전부가 바다로 뒤덮인 행성을 말한다. 여기를 ‘인류은하동맹’ 소속의 소년병 레드가 인간형 AI로봇과 함께 불시착하며 이야기는 시작되는데, 소년의 성장 등을 다룬 따뜻한 작품을 표방했지만, 애초에 스토리작가가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도 ‘평범한 마법소녀 이야기!’라고 해놓고, 소녀들의 모가지를 뎅겅뎅겅(...) 날려댄 인물이라 영...


사실 이 행성에는 동일한 타입의 AI로봇이 하나 더 있었고, 이에 이야기는 두 로봇이 촉발하는 사상 대립, ‘AI는 인간을 지배해야 하는가, 도와야 하는가’로 뻗어나간다. 인류의 수호자로 자신을 정의한 로봇 ‘체임버’는 레드와 함께 또 다른 로봇 ‘스트라이커’와 격돌하지만, 레드가 죽음에 이를 정도로 스스로를 몰아붙이자, 막판에 이르러 레드의 군적을 박탈하고 콕피트에서 방출하는 군용 AI로서 궤를 벗어난 판단을 내린다.

나는 파일럿 지원 계발 시스템. 그대가 보다 많은 성과를 획득함으로써 존재의의를 달성한다. 이 하늘과 바다의 모든 것이 그대에게 가능성을 가져다줄 것이다. 생존하라. 탐구하라. 그 생명에 최대의 성과를 기대한다.
- ‘취성의 가르간티아’, 레드와 헤어지는 체임버



이때의 영상이 참으로 눈부시게 아름다웠는데, 드넓은 창공과 그 아래 끝없이 펼쳐진 적요한 바다, 그 위로 은은하게 쏟아지는 몽환적인 빛은 로봇 특유의 무기질적인 어조로 자신의 파일럿에게 마지막 당부를 건네는 체임버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この空と海のすべてがあなたに...’(이 하늘과 바다의 모든 것이 그대에게...). 내 살다 살다, 사람도 아닌 AI에게 심쿵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조언’은 인간과 AI의 협업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한다. 1997년 IBM의 체스프로그램 ‘딥 블루’가 당시 체스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를 꺾은 이후, AI의 등장이 체스라는 게임의 명맥을 끊어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AI트레이너로 인해 플레이어들의 실력이 일취월장하게 되었고, 심지어 ‘켄타우로스’라는 인간-AI팀이 체스판에서 인간과 AI를 모두 능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다만, 그 반짝임은 찰나에 불과했다. 저자 유발 하라리는 “딥 블루가 카스파로트를 꺾고 난 후 수년 동안 체스에서 인간-컴퓨터의 협력이 빛을 발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컴퓨터의 체스 실력이 너무나 좋아진 나머지 이제 인간 협력자의 가치는 사라졌고, 조만간에는 완전히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될 상황에 처했다.”라고 적었다.


체임버가 주는 낭만, AI가 인간을 수호하고, 인간을 위협하는 적들을 제거하는 서번트로만 작동하는 건, 그저 AI를 향한 우리‘만’의 로망이다. 온갖 위협으로 가득했던 세계에서 안식을 구하기 위해 신을 찾았고, 온갖 범죄가 들끓는 사회에서 안전을 위해 부모를 갈구했으며, 온전히 나 자신을 품어줄 수 있는 보호자를 찾아 헤매는, 그러한 욕망을 로망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한 것. AI가 굳이 그럴 이유는 없는 거 아닌가.


‘보통 사람들의 전쟁’은 미국 사회에서 벌어질 ‘켄타우로스 팀’의 결말을 우려한다. 저자 앤드루 양은 자동화된 생산공정이 도입된 1970년대부터, 경제성장으로 기업의 수익이 증가할 때 근로자의 임금이 조금씩 같이 가지 않게 되었음을 지적하며, ▲기업과 근로자가 더 이상 한 몸이 아니게 되었음을 그리고 ▲자동화 공정으로 없어진 일자리만큼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는 게 아님을 강조했다.


이러한 괴리를 극명하게 일으킬 것으로 우려되는 게 바로 자율주행차라는 게 사뭇 인상적이다. 모건스탠리는 화물운송을 자동화했을 때 절감할 수 있는 비용을 연간 1,680억 달러로 추산했다. 이 정도의 절감이라면, 지금의 화물기사에게 연간 4만 달러의 연봉을 주고 집에 가라고 해도, 연간 1,000억 달러를 절감할 수 있는 규모라 한다. 이러한 경제적 효과 외에 수천 명의 생명까지 구할 수 있다는 건 덤.

전미 도로교통안전국에 따르면 2014 미국에서 대형 트럭과 관련된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3903명이었고, 부상자는 1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고 원인의 90퍼센트 이상이 적어도 일정 부분은 운전사 과실이었다. 사망 사고 7건 가운데 대략 1건은 운전사 과로가 원인이었다. 우리는 대부분 운전을 배울 때 고속도로에서 트럭을 만나면 피하라는 말을 듣는다.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 ‘보통 사람들의 전쟁’, 공장 노동자와 화물차 기사



화물운송 기사는 1년에 240일을 휴게소나 모텔을 전전하며, 하루의 11시간을 도로에서 보낸다. 사방이 막힌 좁은 공간에 하루 종일 있으니, 비만, 당뇨 등 만성질환 하나 정도는 기본으로 탑재하고 있다. 이렇게 열악한 근무환경이니, 사고 원인의 90%가 근무자 과실이라는 것도 이해가 된다. 자율주행차의 도입은 이러한 악조건들을 많이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자율주행차는 시기상조라는 의견 또한 팽배하다. 이유는 이미 나와 있다. ‘화물운송 기사는 1년 240일을 휴게소나 모텔을 전전한다.’ 이것은 화물차 기사가 미국의 지역경제에 혁혁한 공헌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앤드루 양에 따르면, 미국 전역에서 2,000개가 넘는 화물자동차 휴게소가 기사 전용 식당, 오락센터, 식료품점 등을 운영하고 있고, 종사자만 720만 명에 달한다. 자율주행차 도입은 이 생태계의 붕괴를 뜻한다.


예전에는 산업생태계의 혁신으로 근로자들이 실직을 했어도, 비교적 재취업이 용이했다. 지금은 그때와는 조금 이야기가 다른 게, 기존의 일자리가 없어지고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도 이 신규 일자리는 고도의 교육 수준을 요할 가능성이 높다. 화물운송 기사한테, 전자상거래 웹사이트 관리를 맡기면 그게 되겠나.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요구조건은 까다로운데, 그 일자리의 수명이 생각보다 길지 않을 가능성 또한 높다.


최근 AI산업을 선도하고 있는 미국의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등 빅테크에서 무자비한 고용감축을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AI를 끼고 일하는 게, 이제 막 입사한 신삥에게 일을 맡기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다. 한국 취업시장의 특징으로 여겨졌던 ‘경력 있는 신입, 대환영’이 이젠 글로벌 스탠다드로 바로 서려하는 것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도 그렇고, K-컬처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이러한 여건 속에서 힘을 받기 시작한 주장이 바로 ‘기본소득’이다. 앞서, 화물운송 기사들에게 연봉 4만 달러 주고 출근하지 말라고 해도 자율주행차 도입이 이익이라고 했다. 달리 말하면, 이 집에서 쉬는 화물운송 기사들이 받는 4만 달러가 ‘기본소득’인 것이다. 논란의 여지가 다분하겠다만, 극단적으로 말하면 기초수급자가 받는 생계비가 전 국민에게 확대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전쟁’은 이 기본소득과 관련된 선행 연구결과를 소개했다. 1974년 2월 캐나다 정부는 위니펙 북서쪽에 있는 인구 1만 3000명의 도핀이라는 소도시를 골라, 모든 주민을 빈곤선 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미화 5600만 달러에 해당하는 돈을 쏟아부었다. 매월 1000 가구가 아무런 조건 없이 각기 다른 금액의 수표를 지급받았다. 이 돈은 대략 4년간 지급되다가 보수당이 정권을 잡자 중단되었다.


기본소득이 근로의욕을 저하할 거라는 우려와는 다르게, 노동 시간이 유의미하게 줄어든 집단은 출산한 여성과 10대 청소년뿐이었다. 청소년의 경우, 노동 대신 학업에 쏟는 시간이 늘었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작업장에서의 재해가 줄고 응급실에 가는 사람이 감소하여, 병원을 찾는 횟수가 8.5퍼센트 줄었다는 것이다. 정신질환 진료건수와 함께 가정폭력도 줄었다. 총체적으로 빈곤이 사라지니 삶의 수준이 훨씬 나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알래스카 주는 1976년부터 석유를 팔아 연간 몇십억 달러를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2년부터 이 수익을 기금으로 돌려 그 배당금을 주민들에게 지급했다. 덕분에 빈곤이 4분의 1 줄어들었고, 알래스카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소득불평등이 낮은 주가 되었다. 배당금은 출생아의 평균 체중을 늘렸고, 알래스카 원주민의 자립을 도왔다. 또, 해마다 경제활동을 증가시켜 적어도 7000개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역할도 했다.


한때 복지사각지대 발굴을 위해, 기초수급자들을 접해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경험을 떠올려 보면, 과연 근로의욕이 저렇게 유지된다는 것에 새삼 의구심이 생긴다. 뭔가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은데, 그래서 아메리카가 약속의 땅, 멋진 신세계였나 보다. 그리고 어찌 됐건 간에 여기서 중요한 건, AI로 인해 합법적인 불로소득의 시대가 올 수도 있다는 것, 이것 아니겠는가!


TV광고에서는 홀로 사는 노인들에게 웃음을 주는 친구던데, 우리 집에선 말귀를 못 알아먹어 화딱지만 나게 하는 AI가 언젠가는 ‘그 생명에 최대의 성과를 기대한다’라는 간지폭풍을 내뿜는 서번트가 되고, 집에서 놀고 있어도 4만 달러를 주는 화수분이 되어준다. 당면한 우리의 과제는 분명하다. AI가 세상을 제패할 때 우리가 기본소득을 받을 수 있도록 근거 없는 부정을 끊임없이 투출 할 것, 제2차 러다이트 운동이다.



(3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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