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던 엄마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스킨로션의 향긋한 잔향이 머물러 있는 부드러운 볼, 세월의 손길에도 촉촉함을 잃지 않은 피부, 자존심처럼 곧게 서 있는 오똑한 콧날, 고난과 맞서려는 의지가 서린 앙다문 얇은 입술까지도.
땀 냄새 한 점 없는 엄마의 머리카락은 창문 사이로 스며든 바람에 일렁이며, 샴푸의 은은한 향기로 나를 감쌌다. 잠들기 전 손끝에서 느껴지는 엄마의 고운 머릿결은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그 부드러움은 얇은 얼음 위를 걷듯, 물 위를 아슬아슬하게 건너야 하는 나를 단단히 붙잡아 주었다.
다정하고 따뜻한 엄마는 아니었지만, 나는 그런 엄마를 애써 그려내며 상상했다.
권위적이고 폭력을 일삼는 아빠에게 지친 어린 자식들에게 엄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위로였다.
그랬는데. 그렇게 사랑하던 엄마였는데.
엄마는 언제부터 내게 마음의 짐이 되어버린 걸까.
신혼집에 가져갈 예쁜 그릇들을 엄마는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준비하고 있었다.
노란 꽃무늬가 그려진 밥공기와 국그릇, 동그란 반찬 접시와 생선요리를 담을 직사각형 접시.
신혼에 어울리는 노란 꽃무늬 세트는 따로 포장하고, 평소 쓰기 편한 가벼운 그릇들은 별도로 준비했다.
집들이용 고급스러운 한국도자기 세트까지, 그릇만 세 가지로 분류해 하나씩 신문지에 정성껏 포장하고 뽁뽁이까지 꼼꼼하게 감아 라면박스에 차곡차곡 담아두었다.
계란말이용 프라이팬, 둥근 팬, 웍, 샤브샤브용 냄비, 라면용 냄비, 찌개용 냄비까지. 팬과 냄비도 용도별로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다시 한번 살폈다.
"필요할 때 사면 되는데 뭘 그렇게 많이 준비해."
살림 초보인 내게는 조리도구들이 그저 짐처럼 보였고,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는 딸의 말을 바람처럼 흘려들었다.
"오늘은 이걸 준비했다. 이걸 사러 갔다가 저것도 눈에 들어오더라."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신혼살림 구매 이야기에 엄마가 나보다 더 들떠 보였다.
딸보다 더 설레는 모습으로 주방용품, 가구, 이불을 준비하던 엄마는 신혼집에 물건을 내려놓고 돌아서며 하염없이 울었다.
차 문을 열고 아파트 정문을 빠져나갈 때까지 손을 흔들며 우는 엄마를 보고, 그날은 잠들기 전까지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흘렀다.
그랬는데. 그랬던 우리였는데.
엄마와 떨어져 사는 게 낯설어서 출근길마다 전화하던 습관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옅어졌다.
작은 투닥거림들이 있었지만 엄마와 딸이라면 누구나 겪을 소소한 갈등이었는데,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을까.
결혼 후 임신하기 전 3년간, 워커홀릭이었던 나는 엄마와 큰 문제가 없었다.
엄마에게 서운함을 느끼기 시작한 건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였다.
불임으로 어렵게 얻은 임신이었기에 태교에 유난히 민감했던 시절이었다.
태교에 좋다는 음악, 공부, 운동을 가리지 않고 찾아다니며 유난을 떨었지만, 의지로 되지 않는 입덧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열 달 내내 변기를 붙잡고 살았으니, 태교에 신경 쓰며 독서하고 공부하고 싶었지만 내가 가장 많이 마주한 것은 차가운 변기였다.
물만 마셔도 속이 뒤틀리고, 냉장고 앞을 지나가기만 해도 토했다. 냉장고 문을 여는 것만큼 고역은 없었다. 남들은 임산부가 어찌 살이 빠지냐고 했지만, 먹을 수 없으니 살이 빠지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태아에게 영향을 미칠까 봐 두려웠다.
"어쩌냐. 내가 도와주지도 못하고... 네 오빠 아들들 키우느라 엄마는 허리가 나갈 지경이다."
올케는 두 아들을 엄마에게 맡기고 오빠와 맞벌이를 하고 있었다. 친정 부모를 일찍 여읜 올케에게는 시댁이라도 넉넉한 집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가난한 오빠를 만나 맞벌이를 그만둘 수 없었다.
나와 같은 해 임신한 올케는 나보다 먼저 출산했고, 엄마는 고스란히 둘째까지 키워야 했다. 엄마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현실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뱃속 아이를 위해 눈치를 보며 엄마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한 달만 있게 해 줘."
엄마가 끓여주는 김치묵사발을 먹으면 입덧이 사라질 것 같았다. 시원하고 달큼한 육수에 도토리묵과 엄마표 김치가 어우러진 그 묵사발만 먹으면 살아날 것 같았다.
마지못해 뜸을 들이다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2주만 친정에 있어라"라고 한 엄마의 답변은 내가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마주하기 싫은 아빠와의 동거는 나를 받아준 엄마의 용기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한숨소리가 끝없이 이어지는 엄마와의 잠자리는 친정이 있어도 친정이 없는 듯 외로웠다.
차라리 먹지 못하고 변기만 붙들고 있던 내 집으로 다시 가야 할까. 힘들어도 마음 편한 남편 곁으로 가야 할까. 불편했지만 칼칼한 김치찌개와 담백한 잔치국수, 시원한 김치묵사발은 불편함을 잊게 만드는 작은 행복이었다.
주말을 앞두고 딸을 만나러 온 사위도 엄마에게는 귀찮은 손님이었다. 출가 후 듣지 않아서 잊고 있었던 부모의 싸움은 늦은 밤 내 방 불이 꺼지자마자 열렬히 시작됐다.
사위가 있어도 부모의 목소리는 낮아지지 않았고, 격렬하게 다투며 무언가를 던지는 소리까지 들렸다.
부끄럽다. 남편에게 이런 모습까지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잠들지 못한 그는 말없이 나를 안았다. 괜찮다는 듯이. 내가 알아도 괜찮다는 듯이. 너만 있으면 된다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미안해... 이런 모습 보여서. 내일 우리 집으로 가자."
아침밥을 먹고 짐가방을 든 나를 보며 엄마가 물었다.
"왜, 벌써 가려고?"
"남편도 힘드니까 가야 할 것 같아."
해준 게 없어서 미안하다는 엄마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많이 힘드셨구나. 만삭 된 딸까지 더해졌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서운함은 가슴에 오래 남았다. 붙잡지 않는 엄마의 표정이 더 슬프게 마음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