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의 인생을 훔칠 수 있다면, 훔칠 건가요?
오랜만에 단순히 표지에 이끌려 읽게 된 책. 화려하고 판타지적인 느낌이 물씬 풍겨오는 표지에 가볍게 읽기 좋을 것 같아 보여 무작정 구매했다. 요즘 책들은 왜 이렇게 표지를 다 갖고 싶게 만들까? (큰 책장에 책을 가득 채우고 싶다는 로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돈을 모아 이사를...)
이 책을 읽을 때 '빌리아일리시-카피캣'을 들으며 읽기를 추천하신다고 한다. (작가님들은 항상 추천 노래를 책의 마지막 작가의 말에 쓰신다. 이미 다 읽었는데요..ㅜㅜ)
로키라는 악마 주방장이 운영하는 식당이 있다. 그 식당의 이름은 카피캣 식당. 새벽 6시 6분 6초 종로에 나타나는 '김밥지옥'이라 쓰여 있는 가게에 들어가 웰컴푸드를 먹는다. 그리고 주어진 시간 안에 바꾸고 싶은 누군가의 인생 음식을 먹고 나면, 그 사람과 자신의 인생을 맞바꿀 수 있다고 한다.
실장의 스토킹으로 인해 나쁜 소문이 돌고 결국 일을 그만두게 된 정현아는 자신의 실패한 인생에서 벗어나 좋아하는 연예인의 스캔들 대상인 동명이인 연예인 현아와 인생을 바꾸려 한다.
회사에서 매번 구박을 받고 좋아하는 여자에게 무시당한 변만진은 모두가 칭찬하는 동기 정기상을 사칭해 인스타그램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식당의 존재를 알게 된 후, 진짜 그 삶을 빼앗으려 한다.
스타작가 이만도의 삶을 갖고 싶어 하는 작가지망생 김수아.
곧 죽게 될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와 인생을 바꾸겠다고 말하는 서바다.
주방의 물건을 통해 여러 사람의 인생을 빼앗고 다니는 노인 주비단.
이렇게 다섯 명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책을 읽기 전, 유영광 작가님의 <비가 오면 열리는 상점>이라는 책을 읽었다. 그 책 역시 도깨비 구슬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일부러 고른 것도 아닌데 매번 연달아 읽는 책이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있어 읽으며 더 몰입할 수 있고 반가운 기분이 들어 신기할 따름이다.
총 다섯 명의 주인공이 나오는데, 첫 번째 주인공인 현아는 두 현아 모두가 참 안쓰러웠다. 각자의 아픔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없어, 온전한 내 편이 없어 그저 안고 살아가는 모습이 마음 아팠다. 정현아를 통해 정현아가 위로받는 그 장면들이 좋았다. 이름이란 무엇이길래 이런 마음을 품게 할까. "나는 이기적이거든. 그래서 온 세계 사람들의 행복은 빌 수가 없어. 그런데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고는 싶단 말이야. 그래서 나는 가끔씩 현아의 행복을 빌어, 지구 어딘가에 살고 있을 수많은 현아들." (56p)
두 번째 이야기는 읽는 내내 힘들었다. 변만진은 동료 여직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로맨틱 코미디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쫓아다니면서 괴롭히는, 자격지심 심한 남자.'의 표본이다. 정기상을 보며 시기 질투를 하고 몰래 정기상의 것들을 사진 찍어 올리며 인스타그램에서 정기상인 척 사칭한다. 자신이 좋아하던 여자가 자기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너도 나 좋아해서 그랬던 거 아니야?'라고 하며 분노한다. 그는 결국 정기상의 삶을 얻기 위해 그와 같은 노력을 하는 대신, 카피캣 식당을 찾아 삶을 바꾼다. 열등감과 자격지심 때문에 정기상의 진짜 삶에 대한 힌트가 많았음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마지막에 사이다가 존재하긴 하지만 변만진의 심리 묘사가 매우 솔직하고 거침없어서(좋게 말해서..) 불쾌했다. 그만큼 작가님이 이 캐릭터를 잘 표현하신 것이라 생각한다.
스타작가 이만도의 삶을 빼앗으려 한 김수아, 그리고 사랑 때문에 곧 죽을 사람과 삶을 바꾸겠다고 찾아온 서바다. 처음 이 내용을 접했을 때는 참 어리 석어 보였다. 작가가 된다고 그 명성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걸까? 사랑이 뭐라고 췌장암 4기인 사람과 몸을 바꾸겠다니? 심지어 사랑이 아니라 계략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끝까지 읽은 후 두 주인공의 치밀함에 소름 끼쳤고 희열을 느꼈다.
스타작가 이만도는 표절논란에 자주 휘말렸다. 주변인들은 그 진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음에도 외면한다. 세상이 바뀌었다 어쨌다 해도 아직까진 네이밍이 먹히는 바닥이에요. 남의 아이디어를 훔쳤든, 따라 했든 팔리면 그만이죠. (130p)
흥행한 드라마들 중에서도 표절시비가 붙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예 모른 채 드라마를 즐기는 시청자들이 대다수이다. 창작에 있어서 표절의 범위가 애매모호하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정말 표절임에도 불구하고 이름값 때문에 진실이 묻히는 경우도 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욕심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불안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작가님이 주변 지인들에게 '다른 사람의 인생을 훔칠 수 있다면, 훔칠 건가요?'하고 질문했을 때, 대부분이 '훔쳐야지'라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의외였다. 내 대답은 명확히 'NO'이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던 타인의 삶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은 내가 이루어낸 것이 아니며, 주변사람들이 보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기 때문에 그 삶은 결국 공허한 삶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원하던 삶이라면 아마 현재의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삶일 것이다. 그것을 잃지 않고 유지하기 위해 애쓰며 하루하루 살아가야 할 텐데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지 않는가?
누군가는 필자가 현재 인생을 살만하다고 느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 말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닐지도. 그러나 욕심이 없는 사람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겁이 많아서 큰 꿈을 꾸지 못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훔칠 수 있다면, 훔칠 것인가?
'이름'이란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훔칠 수 있다면, 훔칠 것인가?
어떤 인생을 훔치고 싶은가?
"나는 이기적이거든. 그래서 온 세계 사람들의 행복은 빌 수가 없어. 그런데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고는 싶단 말이야. 그래서 나는 가끔씩 현아의 행복을 빌어, 지구 어딘가에 살고 있을 수많은 현아들."
세상이 바뀌었다 어쨌다 해도 아직까진 네이밍이 먹히는 바닥이에요. 남의 아이디어를 훔쳤든, 따라 했든 팔리면 그만이죠.
이만도는 자신이 진실이라 여기면 거짓도 진실로 만들어내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진실이란 올바른 방향을 찾기 위해 나침판을 조정하는 행위가 아닌, 자신이 정해 놓은 이정표만이 진짜라 믿고 걸어가는 행위였다.
분노는 언제나 무기력과 함께 왔다.
사람들은 가끔 착각을 해요. 절대적인 진실이 있다고. 그런 건 없어요. 사람은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니까, 그 사람만의 진실이 있을 뿐이죠.
자신만만한 인간은, 자기가 저평가한 사람은 신경 쓰지 않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