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친정엄마와 도무지 소통이 안된다고 느낀 것이. 어릴 땐 엄마의 일방적인 소통방식을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소통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느낀 건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부터다. 아이와 소통하기 시작하면서 친정엄마와는 다른 소통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슨 일인지 화가 났다. 지인들이 친정엄마와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누는 모습을 부러워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일들이 꿈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요즘이야 아이의 감정과 마음을 읽어주어야 한다지만 친정엄마가 아이를 키울 땐 감정이니 마음이니 하는 이야기들은 어쩌면 사치라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배불리 먹이고 깨끗이 빨래해서 옷 입히면 그게 다라고 생각하셨다.
친정엄마는 “나는 죽을힘을 다했어. 딸이어도 최선을 다해 키웠어”라고 말씀하시지만 정작 딸인 내게는 와닿지 않은 안타까운 사랑 때문에 오래도록 가슴 아팠다. 이제 와서 그때 내게 왜 그랬냐고 따진 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젠 나이 들고 병든 노모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를 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여자가 무슨 공부를 해?라는 분위기의 집안에서 자랐다.
그녀가 어릴 적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이 년은 누굴 닮아서 계집애가 고분고분하지 않고 바락바락 대들어? “ 였다.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따질 것은 따져야 직성이 풀렸던 아이
욕심이 많아하고 싶은 것도 가지고 싶은 것도 많았던 아이
그런 그녀가 스물대여섯쯤 되던 해 한 가난한 청년을 만나 결혼했다.
여러 번의 유산 끝에 낳은 큰 딸
남아선호사상이 충만했던 시절 그녀 역시 아들을 간절히 원했지만 결과는 딸부잣집 엄마가 되었다.
박봉에 많은 식구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느라 부모님 두 분이서 많이 애쓰셨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어느덧 자녀들을 다 출가시켰고 병든 남편마저 하늘나라로 간 이후 그녀는 깊은 우울에 빠졌다.
엄청 애틋하고 금슬 좋은 부부가 아니었음에도 배우자의 죽음은 그녀에게 깊은 외로움과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남편으로부터 온전한 사랑을 받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해 인정 욕구에 목마른 그녀
그녀는 지금도 여전히 손주들을 만나면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돼야지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신다.
상급학교를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어 많이 배우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은 그녀가 손주들에게 기대를 걸어본다.
치매인지 자꾸만 깜빡깜빡해서 불안하다. 그러니 더 정신을 차려야 하기에 약은 목숨처럼 여기며 삼켜본다.
어쩌면 그녀 역시 딸들과 시시콜콜한 일상을 스스럼없이 나누는 화목한 관계를 간절히 원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 어쩌면 그녀는 인정하고 싶진 않겠지만 자신이 치매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