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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물 Aug 21. 2024

엄마와의 대화 1

발가락이 너무 아파 못 견디겠다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는 곧바로 달려갔다.

“왔니?”

엄마는 의외로 차분했다. 종종 엄마는 당장이라도  무슨 큰일이 벌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를 해서 자녀들이 깜짝 놀라 달려오게 만드시곤 한다. 관심을 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겠지 싶다가도 막상 보면 별 일 아닌 일들이 대부분이라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허탈할 때가 많다.

나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엄마의 발가락부터 살폈다. 작년부턴가 엄마의 오른쪽 두 번째 발가락에 티눈이 생겼다. 피부과를 가자고 했지만 엄마는 지인이 약국에서 구입한 티눈약을 바르고 나았다며 한사코 고집을 부리셨다. 시간이 흐르고 여름이 왔다. 올해 유독 습하고 더운 날씨였는데  친정엄마는 꿋꿋하게 티눈약을 바르고는 밴드로 꽁꽁 싸매두었었다. 급기야 염증으로 발가락엔 고름이 가득 찼다. 나는 속상한 나머지 엄마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대체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자식이 하는 말은 조금도 들으려 하지 않으면서 남들이 하는 말은 그렇게 잘 들으시냐? “

딸에게 싫은 소리 듣는 게 좋을 리 없는 엄마의 낯빛이 금세 뾰로통해졌다. 당장 피부과에 가서 치료를 받자고 하니 아무 데나 가기는 싫으시단다. 오래전부터 다니시던 피부과가 오늘은 휴무니 내일 가시겠다고 한사코 거부하셨다. 황소고집을 누가 말릴 수 있을까? 마음대로 하시라고 하니 집안엔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엄마가 무슨 말을 하거나 어떤 행동을 하든 너그럽게 이해해야지 하면서도 한 번씩 고집부리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깊은 한숨이 나오고 이내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치매 때문인지 아니면 노화로 인해 고집스러움이 더 강화된 건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저 나아질 기미 없이 반복되기만 하는 이런 일들을 겪어내는 것이 힘에 부친다. 치매환자는 전두엽의 손상으로 고집이 더 세지고 감정조절이 안되며 자기주장이 강해지신다고 하지만 사실 친정엄마는 원래 고집이 세셨고 자기가 마음먹은 건 곧바로 실행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셨다.

 “좀 시간을 두고 기다려 보자”

“엄마! 며칠 더 생각해 보고 결정하는 건 어때?”

엄마는 이런 말을 가장 싫어하셨다. 그러니 매사 심사숙고한 뒤에 결정을 내리셨던 친정아버지와는 사사건건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엄마에 대한 나의 감정을 표현이라도 하면 엄마는 자기가 비난받는다고 생각하셔서 너무 서운해하신다. 노년의 엄마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더구나 이제는 점점 인내심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워 눈앞에서 바로 해결하지 않으면 다섯살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신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6월 초에 문득 거실에 있는 에어컨을 보다가 연식이 있는 에어컨이라 미리 점검해야겠다 싶어 한번 틀어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실외기가 몇 번 돌더니 그만 멈추는 것이 아닌가?  2년 전 열대야와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에 에어컨이 고장 나 급하게 AS를 받은 적이 있었다.

여름이 오기 전에 미리 알게 되어 다행이다 싶었다. 한여름에 고장이라도 나면 더위에 고생도 고생이지만 AS기사님들이 바쁘셔서 약속 잡기가 무척 어려웠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아직 에어컨을 틀기 전에 발견해서 다행이다. 내가 신청할 테니 AS 받자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 날부터 시작됐다.

왜 AS기사가 안 오냐?부터 시작하시더니 하루 이틀 지나자 더워죽겠다 에어컨을 틀어야 하는데 틀질 못하니 더워서 못살겠다 하시는 게 아닌가? 6월 초인데… 더구나 엄마는 아주 폭염이 아니면 에어컨을 틀라고 해도 틀지 않으시던 분이었다. AS를 신청하면 운 좋게 바로 오시기도 하지만 스케줄상 보통 며칠 걸리기 마련인데 그걸 기다리지 못하신다는 게 너무 당황스러웠다.


힘든 세월을 살아오면서 뾰족했던 엄마도 연세가 지긋해지면 성격도 부드러워지고 생각도 더 너그러워지실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쯤은 자녀들과의 사이도 더 편안해질 줄 알았다. 실제로 세월이 흐르면서 엄마를 둘러싸고 있었던 모든 갈등관계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되었고 엄마는 그 모든 힘든 관계들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런데 엄마는 여전하다. 아니 어쩌면 치매증상으로 인해 더욱 완고해졌다고 해야겠다. 치매환자에게는 비난하는 투로 이야기하거나 감정이 상하게 하면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사실 이런 상황에 닥치면 감정을 차분하게 조절하기가 어렵다. 오늘도 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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