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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물 Aug 13. 2024

엄마와 가스요금고지서

“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것만 누가 자꾸 가져가는 거 같아”

친정엄마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이번엔 또 뭘까?’


“누가 엄마 것만 가져가? “

“가스요금고지서말이야. 25일만 되면 우편함에 늘 꽂혀있었는데 이번달엔 안 꽂혀있어서 납부기한이 넘어갔지 뭐야? 아무래도 8층이 자꾸 가져가나 봐 “


이젠 도둑망상인가? 싶었다. 도둑망상은 치매 증상 중 하나다. 하지만 그동안 친정엄마는 한 번도 누가 뭘 가져갔다고 의심하진 않았다. 그런데 처음엔 소음으로 괴롭히더니 이번엔 윗집에서 자신을 괴롭힐 작정으로 우편함에 손을 댄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고지서를 우편함에 꽂아두는 직원이 실수로 누락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선 나는 우리가 알아보겠다고 하고 엄마를 최대한 안심시켰다. 하지만 성미가  급한 엄마는 본인이 직접 확인해봐야겠다 싶었는지 바로 다음날 아침이 되자마자 관리사무소로 달려갔다. 사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몇백 원 연체료내면 그만이다. 하지만 엄마에겐 심각한 일이었다.


관리사무소에 다녀온 엄마는 여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오셨는지 속상해하시며 목소리를 높였다.

“글쎄 기분 나쁘게 날더러 병원에 가보라잖아? 고지서가 없어져서 확인하러 간 건데 그럼 확인해 주면 될 것이지 왜 날더러 병원에 가래? 내가 나이 많아 늙었다고 아주 날 무시해. 지는 안 늙나?”


이미 층간소음문제로 관리사무소와는 한차례 옥신각신했던 터라 아마도 엄마를 요주의인물로 여겼던 것 같다. 그동안 엄마에게 시달렸을 직원들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알아보겠다고 좋게 이야기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서운함도 들었다. 하지만 가족인 나조차 때로는 엄마가 억지를 부리며 당장 해내라고 할 때는 짜증이 올라오는데 남이야 오죽할까 싶었다.


사실 모든 공과금은 자동이체해 두고 모바일로 고지서를 받으면 편리하다. 하지만 ATM기도 못 미더워 여태껏 은행창구만 고집하시는 엄마에게 자동이체는 먼 나라 이야기다. 이젠 은행지점도 축소돼서 은행업무를 보려면 거리도 꽤 멀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자동이체해 놓으시길 권했지만 엄마는 극구 반대하셨다. 80년 넘게 창구에서 은행업무를 보셨는데 모바일이나 인터넷뱅킹은 영 탐탁지 않으신 것이다.


며칠 후 언니는 관리사무소 직원과 대면했다. 직원은 그동안 엄마가 관리사무소에 쫓아와서는 괜한 의심을 하고 억지를 부리셨다며 그간의 힘듦을 호소했단다. 관리사무소직원과 엄마 양쪽 모두 감정이 격해진 상태였기에 언니는 상황을 잘 설명하고 돌아왔다. 관리사무소직원의 고충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씁쓸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


사실 고지서의 행방은 끝내 밝혀지진 않았다.

다만 치매어르신을 보는 지역사회의 냉정한 시선을 마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치매에 걸리면 무조건 병원에 계셔야 하는 건 아니다. 친정엄마처럼 초기치매의 경우는 도움이 어느 정도 필요하긴 하지만 일상생활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물론 증상이 심한 치매환자들을 가정에서 간호하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유럽에서는 치매환자가 일상성을 잘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들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네덜란드의 호그백이나 노르웨이의 카르페디엠 같은 치매마을정책들을 보면 치매환자를 시설에 격리해야 할 무서운 질병이 아니라 노화의 한 과정으로 인식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 마을에서는 치매환자를  더 이상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한 마을의 주민으로 여긴다는 게 그저 부럽기만 하다. 물론 이런 정책들은 국가의 지원과 국민들의 인식의 전환이 요구된다. 하지만 급속도로 노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우리나라도 치매환자의 돌봄을 병원과 요양시설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그들이 평범한 일상속에서 존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정책들이 나오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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