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 동네 작은 레스토랑에서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느긋하게 하고 나와 천천히 걸었다. 그동안의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졌다. 우여곡절 끝에 잠비아에 도착한 우리는 리빙스톤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다.
내일은 세계 3대 폭포 중의 하나인 빅토리아 폭포를 보러 갈 계획이다. 이곳 리빙스톤은 조용하고 정겹다. 문득 길가에 있는 하얀 집 창가에서 반갑게 손을 흔드는 여자아기와 눈이 마주쳤다. 낯선 외국인들을 보는 아기의 눈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곁에 있던 아기 엄마도 반갑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낯선 이방인에게 기꺼이 손을 흔들어줄 수 있는 것도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아프리카에서 배웠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우리의 눈빛은 서로 안녕? 만나서 반가워라고 말하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살랑이고 어스름해질 무렵 저녁을 먹고 나와 숙소로 걸어가는데 저기 한쪽 마당에 아이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아이들은 책상에 앉아서 열심히 문제를 풀고 있었고 젊은 남자가 칠판에 뭔가 열심히 적으며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궁금해 다가가 물어보니 젊은 선생님은 재능기부로 방과 후에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아이들은 고등학생쯤 되어 보였는데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저 아이들에겐 어떤 꿈이 있을까? 야외에서 가르치다 보니 선생님은 이미 목이 많이 쉬었다.
불과 2~30년 전 우리나라에도 야학이라는 것이 있었지… 아들의 눈엔 야외에서 책상과 칠판을 놓고 배우고 가르치는 풍경이 그저 신기하기만 한 것 같았다. 선생님의 열정이 주는 감동이 진한 여운을 남기는 저녁이었다.
다음날 아침 빅토리아 폭포로 향하기 위해 우버를 탔다. 아들은 우리가 세계 3대 폭포 중 하나를 보게 될 거야라는 말에 별로 감흥이 없다. 오히려 폭포 입구를 왔다 갔다 하는 야생원숭이와 곤충에 더 흥미진진하다.
빅토리아 폭포로 가는 길은 의외로 소박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폭포로 가는 길 입구엔 카페와 식당 그리고 상점들로 빼곡했을 텐데 우비와 기념품을 파는 상점 몇 개 작은 식당 하나 정도가 전부였다. 입구에서 폭포를 보기 위해 걸어 들어 갈수록 점점 쏟아지는 물줄기소리가 커졌다. 그리고 드디어 눈앞에 빅토리아 폭포가 펼쳐졌다.
장엄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카메라로 한 화면에 다 담기지 않는데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경이로움 앞에 먹먹한 심정으로 서 있는데 갑자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들이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감동의 눈물이냐고? 아쉽게도 그럴 리는 없었다.
아들에게는 웅장한 폭포소리가 거슬리기 시작했고 폭포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이 튀어올라 주위를 소낙비처럼 적시니 흠뻑 젖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싫어서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나는 우비를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 살면서 느닷없는 소나기를 맞을 때도 있지 않은가?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겠지만 옷이 좀 흠뻑 젖는다고 어떻게 되진 않는다는 걸 한 번쯤은 경험해보게 하고 싶었다.
결국 좀 더 폭포를 가까이 보러 가는 길을 아들은 가기 싫다고 완강히 거부했다. 아들을 포함해 일행 중 몇 명은 벤치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나는 좀 더 폭포를 가까이 보기 위해 들어갔다.
다리를 건너니 폭포를 더 가까이 볼 수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폭포에 두 개의 무지개가 펼쳐졌다.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연이 건네는 위로에 말로 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이 느껴졌다.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고 토닥토닥해 주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난 이 폭포를 만나려고 아프리카에 왔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