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여행

by 산이세라

"조난객이 되는 것은 계속 원의 중심점이 되는 것과 같다. 아무리 많은 것이 변하는 것 같아도 - 바다가 속삭임에서 분노로 변하고, 상큼한 하늘이 앞이 보이지 않는 흰색이 되었다 칠흑같이 까맣게 변해도 - 원점은 변하지 않는다. 당신의 시선은 언제나 반지름이다. 원주는 대단히 크다. 사실 원들이 겹쳐 있다. 조난객이 되는 것은 춤추듯 겹쳐지는 원들 사이에 붙들리는 것이다. 당신은 한 원의 중심이며, 당신 위에서 두 개의 반대되는 원이 휘휘 돌아간다. 군중 같은 태양에 시달린다. 군중이 시끄럽게 밀려들면 당신은 귀를 막아버리고 싶다. 눈을 감고 싶고, 숨고 싶다. 외로움을 조용히 일깨워주는 달에 당신은 시달린다. 당신은 외로움에서 벗어나려고 눈을 크게 뜬다. 고개를 들면, 때로 태양의 폭풍 중심에서, 고요의 바다 한가운데서 누가 당신처럼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지 않을까 궁금해진다. 그 사람도 점에 갇혀서, 두려움과 분노, 광기, 무력감, 냉담으로 발버둥 치고 있을까." (파이이야기 / 얀마텔 / p.268)


우리 모두는 지구에 떨어져 계속 원의 중심점이 되어 시선은 언제나 반지름일 수밖에 없는, 춤추듯 겹쳐지는 원들 사이에 붙들리는 조난객이 아닌지... 원주는 대단히 크고, 원들은 겹쳐 있으며 나는 그 원 안의 세상밖에 볼 수 없고, 시선의 한계는 반지름 이상이 될 수 없는...

세계가 아무리 넓고 크다고 하더라도, 물리적으로 나의 세계는 언제나 그 반지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아무리 빠르게 이동하더라도, 나의 세계는 춤추는 원들 사이에서 움직일 뿐이며 순간순간의 나의 세계는 나를 둘러싼 원의 넓이 이상으로 넓어질 수 없다.


조금 전에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 대한 주제로 글쓰기 하는 카페에 '내가 좋아하는 장소는 내 속이다'라고 적은 글을 보고 <파이 이야기>의 '시선은 언제나 반지름'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물리적으로 시선은 언제나 반지름일 테지만 내 속에서 시선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내 속에서의 시선은 아주 오래전 과거와 먼 미래까지 넘나들고, 공간적으로는 우주 끝까지도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마음속 여행을 사람들은 좋아하는 걸까, 그것을 시각적으로도 만족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체가 TV나 스마트폰일 것이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지 모르겠다. 그런 기기가 없었을 때에는 그 수단은 오직 책과 화가들의 그림, 고대로 여행할 수 있게 해주는 박물관의 유물, 아니면 나그네들이 전달해 주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 이런 것들밖에 없었을 거다. 어렸을 적에는 음악을 들을 때 어딘가 있을 것 같은 먼 환상의 세계가 느껴지기도 했으니 음악가들이 음악 속에도 우주를 담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예술가들은 우리를 둘러싼 원주 밖으로 한치도 나갈 수 없는 물리적 한계 속의 인간들에게 무한히 세계를 확장시켜 주기에 실제의 여행보다도 더 오랜 세월 동안 사랑받아왔던 것인가 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까지도 있었던 나그네들을 환대하는 관습도 직접 여행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여행의 경험을 나그네들이 전해 주기에 기꺼이 환대하여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생겨났을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에서 소설 속 인물인 데제생트 공작이 디킨스의 책을 읽다가 런던을 여행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길을 나섰는데, 영어 책방에 들러 <런던 안내>를 사고 영국 선술집에 들렀다가 점점 여행에 대한 권태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정황을 보여준다.

"실제로 여행을 하면 얼마나 피곤할까. 역까지 달려가야 하고, 익숙하지 않은 침대에 누워야 하고, 줄을 서야 하고, 약한 몸에 추위를 느껴가며 베데커가 그렇게 간결하게 묘사한 볼거리들을 찾아 움직여야 하고..... 그렇게 그의 꿈들은 더럽혀졌다. "의자에 앉아서도 아주 멋진 여행을 할 수 있는데 구태여 직접 다닐 필요가 뭐가 있는가? 런던의 냄새, 날씨, 시민, 음식, 심지어 나이프와 포크까지 다 주위에 있으니 나는 이미 런던에 와 있는 것 아닌가? 거기 가서 새로운 실망감 외에 무엇을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데제생트는 탁자에 앉은 채 생각했다. "나의 유순한 상상력이 알아서 가져다 바치는 광경들을 거부하고 늙은 멍텅구리들처럼 해외여행이 필요하고, 재미있고, 유용할 것이라고 믿다니, 내 정신이 잠시 착란을 일으켰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데제생트는 계산을 하고 선술집을 떠나, 트렁크, 짐 보따리, 대형 여행 가방, 바닥 깔개, 우산, 지팡이와 더불어 그의 별장으로 돌아가는 첫 기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집을 떠나지 않았다."


"네덜란드를 다녀온 뒤, 그리고 영국을 가려다가 만 뒤, 데제생트는 다시는 해외여행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는 별장에서 살면서 여행의 가장 훌륭한 측면, 즉 여행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여러 가지 물건들로 주변을 꾸몄다. 벽에는 여행사 진열장처럼 채색 인쇄물들을 걸어놓았다. 외국의 도시, 박물관, 호텔, 발파라이소나 라플라타 강으로 떠나는 기선을 보여주는 인쇄물들이었다. 또 주요 선박회사의 항해 일정표를 액자에 넣어, 침실에 한 줄로 걸어두었다. 어항에는 해초를 채우고, 돛, 항해 장비, 타르 단지를 사들였다. 그리고 이런 것들의 도움을 받아 불편은 전혀 겪지 않고 긴 항해 여행의 가장 유쾌한 측면들만 경험할 수 있었다. 위스망스의 말에 따르면, 데제생트는 "상상력은 실제 경험이라는 천박한 현실보다 훨씬 더 나은 대체물을 제공할 수 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실제 경험에서는 우리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 때문에 정작 우리가 보러 간 것은 희석되고 만다. 우리는 근심스러운 미래에 의해서 현재로부터 끌려 나온다. 당혹스러운 신체적, 심리적 요구들 때문에 미학적 요소들의 감상은 방해를 받는다.

나는 데제생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했다. 그러나 나 역시 그냥 집에 눌러앉아 얇은 종이로 만든 브리티시 항공사의 비행시간표의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며 상상력의 자극을 받는 것보다 더 나은 여행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느낀 적이 몇 번 있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더 무한한 여행을 책을 통해 앉아서도 즐길 수 있기에 실제의 여행을 떠나고자 하는 발걸음은 자꾸만 게을러진다. 그래서인가 사실 나에게도 데제생트처럼 여행에 대한 욕망은 없다. 시간이 생기면 여행을 가야만 할 것 같은 의무와 압박감만 있을 뿐이다. 데제생트에게 디킨스 책을 읽다가 순간 생겨났던 것과 같은 욕망이 어쩌다가 가끔씩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여행지에서 사실 그 여행지 자체를 보기보다는, 관광객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조성해 놓은 것들을 보게 되었던 과거의 여행 경험들에 더욱 안 좋은 선입견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실제의 여행이 결코 데려다줄 수 없는 소인국과 거인국까지도 여행할 수 있는 <걸리버 여행기> 책이 지금 현재에도 바로 옆에 놓여있기에 당장 책을 손에 들고 떠날 수 있는 이런 책 속 여행보다 다른 여행들이 더 강하게 나를 유혹하지는 못한다.


사람들이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의 멈춤이 가능해지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이런 면에서 나에게 코로나 시기야말로 그러한 반복되는 일상을 멈추고 조용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여행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한 달 살기 같은 여행을 계획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던 중에 코로나가 왔다. 그전까지 계속 연결되어 오던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반 강제적으로 끊어지면서 실제로 공간을 이동하지는 않았지만 외부와 단절되어 마치 먼 곳으로 이동해서 한 달 살기를 하는 것 같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마침 그때 소로우의 <월든>을 읽었다.

지금 잔상으로 남은 그때의 기억은 실제로 <월든>을 여행했을 때 남았을 기억과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그 시기의 경험은 <월든>을 직접 여행했더라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월든>의 내용과 오히려 더 비슷한 것 같은 은둔의 경험이었다. 어차피 <월든> 호수에 갔더라도 소로우가 살았던 시대의 그 <월든> 호수는 아닐 테니 그곳은 책으로밖에 방문할 수 없다. 상상 속 <월든> 호수가에서 소로우의 이야기까지 들었으니 그 얼마나 풍부한 여행인지...

그 무렵에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읽었고, 위에 적은 구절에 공감하며 나의 여행에도 '방구석 여행'이라 이름 붙였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에도 상하이에 집필을 위해 여행을 떠났다가 공항에서 필요한 서류가 없어 강제 귀국 당한 뒤, 한 달 동안 실제로 여행을 간 것처럼 방구석에 틀어박혀 집필에 몰두했던 경험이 나온다.


"출국 - 상하이 체류 - 집필 - 귀국이었는데, 그게 출국 - (극단적으로 짧기는 했지만) 상하이 체류 - 귀국 - 집필로 바뀐 것뿐이지 않을까? 결과만 보면 그렇게 봐도 상관이 없을 정도였다.

장편소설이라는 게 한 번 탄력을 받으면 작가를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가 정말로 집필에 전념한다면 그가 실제로 어디에서 쓰고 있는가는 거의 중요치 않으며, 때로는 아예 잊어버리게 된다.

한 달간의 '내 방 여행'에서 돌아온 어느 날, 한겨울의 한강변으로 나가 걸었다. 마치 오랜 외국 여행에서 갓 귀국한 사람처럼 서울의 모든 것이 낯설게 보였다.

작가는 대체로 다른 직업보다는 여행을 자주 다니는 편이지만, 우리들의 정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로 다녀오는 여행이다.

토끼굴 속으로 뛰어들면 시간이 다르게 흐르며, 주인공의 운명을 뒤흔드는 격심한 시련과 갈등이 전개되고 있어 현실의 여행지보다 훨씬 드라마틱하다." (여행의 이유 / 김영하 /pp.25~26)


책을 통한 여행에 더해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로까지도 여행을 다녀올 수도 있나 보다.

이런 여행상품은 팔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자본주의 세상에서 상품으로써 광고되지도 못했을 것이고 쉽게 접할 수도 없는 여행상품이었을 거다.

여행지에 가더라도 우리의 원의 중심은 지구 위에서 조금만 위치를 바꾸었을 뿐, 그곳에서 만나게 되는 오래된 건물들과 박물관과 미술관 등을 통하여 어차피 우리는 시공을 초월한 경험을 해야 여행의 여운을 더욱 가슴 깊이 간직하고 돌아오게 되는 것 아닐까.

원 안의 세계밖에 볼 수 없는 한계를 벗어나고자 끊임없이 몸을 이동시켜 다른 원의 중심에서 세계를 보지만 사방을 둘러보아도 실제로는 반지름의 끝밖에 볼 수 없다. 그러한 시선의 물리적 한계를 상상 속에서는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기에 무기력하고 게으르고 진취적이지 못한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책을 옆에 높이 쌓아놓고 즐기는 방구석 여행을 사실은 가장 좋아하는 것 같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창밖으로 창릉천과 북한산이 보이고, 6층 우리 집 창문 앞까지 소나무가 자라 까치집이 눈높이에 있어 새들이 가끔 눈길을 끌기도 하고, 책과 커피가 놓인 테이블에 앉으면 세상에 아무것도 부러운 것이 없는 나의 '방구석'이다. 게다가 얼마 전에 드디어 집구조를 바꾸어, 넓은 유리창으로 햇빛이 비춰 들어오는 곳에 테이블이 놓인 바로 그 꿈꾸던 장소인 것이다.

이전 01화난 무엇을 꿈꾸는가 (살고 싶은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