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

by 산이세라


https://youtu.be/YVB8vL7rBjY?si=mfxgdxtPvXz9TnyJ



여름의 끝

박연준


오래된 시간 앞에서 새로 돋아난 시간이 움츠린다

머리에 조그만 뿔이 두 개 돋아나고

자꾸 만지작거린다

결국 도깨비가 되었구나, 내 사랑


신발이 없어지고 발바닥이 조금 단단해졌다

일렁이는 거울을 삼킬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수천 조각으로 너울거리는 거울 속에

엉덩이를 비추어 보는 일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


두 손으로 만든 손우물 위에

흐르는 당신을 올려놓는 일

쏟아져도, 쏟아져도 자꾸 올려놓는 일


배 뒤집혀 죽어 있는 풀벌레들,

촘촘히 늘어선 참한 죽음이

여름의 끝이었다고

징- 징- 징-

파닥이는 종소리



여름의 끝자락

김동률 노래


더운 여름의 끝자락

매미들은 울어대고

느릿느릿 읽던 책 한 권 베고서

스르르 잠든다

내가 찾아간 그곳은

꿈에서만 볼 수 있는

아침이면 까마득히 다 잊혀질

아득히 먼 그곳

가물가물 일렁이는

누구일까 애타게 떠올려 봐도

무엇을 찾고 있는지

코끝이 시리다

홀로 걷고 있는 이 길

어제처럼 선명한데

이 길 끝에 나를 기다릴 누군가

마음이 급하다

라라라라 읊조리면

어느샌가 겹쳐진 낯익은 노래

그 순간 눈은 떠지고

바람만 흐른다

또 꿈이었나 멍하니 기지개를 켜다가

젖어 있는 내 두 눈을 비빈다



여름의 끝자락에 박연준 시인이 '너의 작업실'에서 '여름의 끝'에 느끼는 마음을 이야기했을 때 시인의 말은 그대로 나의 마음이었다.

여름 저녁의 습한 공기와 풀냄새 속으로 걸어갈 때마다 대지의 기운에 온몸을 담그고 그 일부가 되는 것 같은 그 느낌이 좋아서... 여름이 지나가는 게 안타까웠다.

편하게 입고 다니던 반바지를 긴 바지로 이제 갈아입어야 하는 걸까 고민하던 순간에도...


좋아했던 사람이 선물해 준 김동률 음반을 듣고 또 들었던 기억도 여름의 일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여름의 끝자락 어느 날에 '노래방'에서 김동률만 골라서 불러대고 난 다음

그 사람의 전화를 받지 않았고...

여름이 가을로 접어들듯이... 내 마음도 다른 계절로 넘어섰다.

여름의 열기에 쉽게 더워졌던 마음은 가을로 접어들면서 금세 식어버렸던 것 같다.

한여름 밤에 요정의 장난이었기 때문인지도...

사랑은 사람이나 음악만이 아니라 계절에도 영향받아 자연의 법칙을 따를 것을 끝없이 요구받는다. 저항하지 않고, 마음을 억지로 붙잡지도 않고 내버려 둔다면... 자연스럽게... 마음도 그렇게 흘러가는 것 같다.


작년에는 가을이 참 길었다.

코로나에 걸려서 하루 종일 잠들었었던 나는 오랜 기억 상실에서 회복되어 어느 부분에서 깨어나고, 그전과 다른 존재가 되었던 것 같았다. 늘 금방 끝나버렸던 것 같은 늦가을이 그해에는 오래오래 계속되면서 음악이 너무 좋았다.


여자들은 몸 안에 아이를 잉태하는 순간부터 조금씩 다른 존재로 변하고, 출산 과정을 겪으며 이전의 존재와 결별하는 한차례의 '죽음'을 겪는 것 같다. 그렇게 다른 사람이 되어 아이에게 흠뻑 빠져 오직 '아이'만을 사랑하고 살다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코로나'와 같은... 다시 한번 죽는 것과 비슷한 체험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렇게 깊은 잠과 죽음의 시간에서 깨어나는 사람들은... 다시 깨어날 때는 그전과 확연히 또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같다.


지난해 가을... 운전하던 시간은 라디오 93.1 <명연주 명음반>의 정만섭 씨 진행 20주년 기념으로 진행자 정만섭의 베스트 음반 20곡을 소개하는 시간과 겹쳤다. 아이를 데려다주고 차 안에서 듣던 곡을 끝까지 듣기 위해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때마다 차 밖의 풍경에는 늦가을도 오래도록 함께 있었다. 그래서 그 해의 가을은 어느 해보다도 길었던 느낌이다.

죽어있던 음악들은 한 곡 한 곡씩 다시 마음속에서 살아나고 있었다.


명연주 명음반을 진행하던 김범수 씨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새로 맡아 진행했던 정만섭 씨는 그 자리를 지키며 20년 동안이나 그대로 있었던 거였다.

신춘문예 음악평론에 당선되기도 했던... 베토벤을 닮았던 학교 선배가 김범수 씨와 만나기로 약속했던 자리에 우연히 함께 가게 된 적이 있었다. 종로의 어느 찻집에서 음악회가 끝나고 늦은 밤... 계절은 기억나지 않지만...

김범수 씨가 떠나고 젊었던 정만섭 씨가 새로 와서 20년 동안이나 그곳에서 음악을 들려주고 같이 나이 들어가다가 음악에서 멀어지고 길을 잃었던 나에게도 어떤 가을날 다시 찾아왔던 것처럼...


여름의 끝에 '배 뒤집혀 죽어있는 벌레들의 참한 죽음'을 보며 아픈 마음은 가을이 위로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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