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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꿈꾸는 청년의 모험

‘펜과 종이’를 타고 떠난 반성과 책임, 그리고 사죄의 섬 이야기

by 제로 Mar 24. 2025

어느 마을에 한 청년이 살았다. 청년은 늘 바다를 동경했다. 언젠가는 섬에 가서 잠시라도 휴양을 즐기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 번 ‘펜과 종이’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상상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번에 청년이 도착한 곳은 ‘반성과 책임, 사죄’라는 이름의 섬이었다. 그는 섬에 발을 내리자마자 넓고 조용한 길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금 걷다 보니 한 일본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청년은 반가운 마음으로 다가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누구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러자 남자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내 이름은 오다 노부나가일세.”


청년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오다 노부나가? 처음 들어보는데... 혹시 살아계셨을 때 어떤 일을 하셨는지 여쭤볼 수 있을까요?”


오다 노부나가는 잔잔히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일본 전국시대의 혼란을 종식시킨 인물이네. 봉건 영주이자 무사 계급인 다이묘였고, 장군이기도 했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연합하여 다케다 신겐의 아들인 다케다 다쓰요리를 물리친 ‘나가시노 전투’가 대표적 사례일걸세. 그때 철포, 즉 조총 3000자루를 모아 대규모 철포부대를 꾸렸고, 다케다의 기마대 1만 2천 명을 섬멸했지.”


청년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아, 기억났어요. 현대에도 역사를 공부하며 오다 노부나가를 롤모델로 삼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일본의 기업가 이나모리 가즈오가 세운 ‘세이와주쿠’에서 공부한 손정의 씨도 그중 하나라고 들었어요.”


오다 노부나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만. 그나저나 자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 거네. 계속 걸어가 보게나.”


청년은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네, 알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오다 노부나가 씨.”


청년은 다시 길을 떠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중요한 것을 깜빡 잊었다. 상상의 마을에서 길을 헤매지 않으려면, 만난 인물들에게 다음에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어봐야 했는데 그러질 못한 것이다.


한참을 걸어가다 보니, 또 다른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청년은 다가가 공손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반성과 책임, 사죄’라는 이름의 상상 속 섬에 잠시 쉬러 온 청년입니다.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고, 무슨 일을 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 남자는 은은한 미소를 띠며 답했다.


“나는 센노 리큐라고 하네. 일본 다도의 예법을 정립한 승려이자 정치가였지.”


청년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차를 달이고 마시는 예의범절, 즉 다도를 정립하신 분이시라고요?”


센노 리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나는 오다 노부나가 장군과, 장군이자 정치가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차 스승 역할을 맡았었지. 예술 담당자로서 그들에게 중용되었네. 덕분에 정권 내부 의사결정의 질도 높였다고 생각하네. 예술적 시선이 때로는 옳은 길을 보여주기도 하니까.”


청년은 감탄하며 말했다.


“정말 그렇네요. 예술은 정치, 경영, 인문학 등 여러 분야에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제가 다음에 누구를 만나면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센노 리큐가 한쪽 길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 길을 따라가면, 나에게 할복을 명령했던 장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날 거라네. 잘 다녀오게.”


청년은 감사 인사를 하고 길을 계속 걸어갔다. 그러다 보니, 마침내 임진왜란을 일으킨 우리 민족의 원수 중 한 명,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걸어오고 있었다. 청년은 마주치자, 형식상으로만 건성 예의를 차리며 물었다.


“안녕하세요. 임진왜란을 일으킨 조선의 원수, 장군이자 다이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맞으시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네.”


청년은 곧장 질문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여쭤볼게요. 왜 조선을 침략했습니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나는 원래 예술 담당자로 센노 리큐를 중시하고, 정치와 전투 쪽은 동복 동생인 도요토미 히데나가에게 맡겼었다네. 그런데 히데나가가 병으로 죽자, 정권 내부 의사결정의 질이 급격히 떨어졌지. 결국 한 달 후에는 센노 리큐에게도 할복을 명령했네. 그리고 나 혼자 독단적으로 모든 결정을 하다 보니 조선 침략 같은 무리수를 뒀고, 다이묘들을 지치게 만들었어. 심지어 내 후계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쓰구 일족도 학살하며 정권을 붕괴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했지. 균형감각을 잃고 독단적으로 행동한 결과였다고 인정하네.”


청년은 히데요시의 말을 듣고는 화가 치밀었지만, 꾹 참고 자리를 떴다.


“알겠습니다. 당신 말 잘 들었고요. 부디 반성이나 좀 하세요. 그런데… 혹시 당신 다음으로 제가 만나야 할 사람이 누구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일본 전국시대 최후의 승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일세.”


청년은 더 묻지 않고 바로 길을 떠났다.


이번에도 한참 걸었을까, 드디어 한 남자가 보였다. 청년은 조심스레 다가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씨이신가요?”


남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맞네. 반갑다네.”


청년은 궁금증 가득한 눈으로 질문했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비교했을 때, 당신은 어떤 인물로 알려져 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여유롭게 웃었다.


“우리 세 사람을 상징적으로 비교하는 이야기가 있지. 좀처럼 울지 않는 새가 있다면, 오다 노부나가는 새에게 ‘울라!’ 하고 명령한 뒤 그래도 울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버린다고 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떻게든 새가 울게 만들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한다고 하네. 그리고 나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고 하지. 또한 나는 금전적인 이익에도 밝은 인물이었는데, 시녀들이 밥을 많이 먹지 못하도록 일부러 음식을 짜게 만들어 비용을 절감하기도 했네. 전쟁 중에도 총알 재료인 납을 미리 다 사들여서, 내 편이 된 다이묘들이 납을 달라고 하면 마진을 붙여 되팔기도 했지. 하하.”


청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저는 이제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올 수 있을까요?”


이에야스는 청년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이곳 ‘반성과 책임, 사죄’라는 섬에 오래 머무르는 것도 좋지만, 자네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게 더욱 중요하다네. 필요하면 언제든 또 오게나. 다음번엔 17세기부터 이어지는 일본 근세 시대의 학자들도 만날 수 있을 걸세.”


청년은 환하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꼭 다시 오겠습니다.”


그렇게 청년은 ‘펜과 종이’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상상의 섬 ‘반성과 책임, 사죄’를 떠났다.


어느 날 다시 찾아올 그날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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