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추노
데카르트의 등장으로 달라진 예술
서양철학사에서 위대한 터닝 포인트 중 하나는 데카르트의 등장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며 기존의 존재론의 전제를 뒤엎는 대담한 선빵을 날린 것이다. 여기서 존재한다는 당연히 그냥 그대로 있는 Be동사이다.
데카르트는 물론 영어의 Be 동사가 아니라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Cogito, ergo sum 혹은 Je pense, donc Je suis 라고 말했다.
이 말이 왜 이리도 중요할까? 바로 이전까지의 존재는 그냥 그 자체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플라톤의 이데아나 존재론 Ontology에서 존재 Being는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이지 전제 조건 같은 것은 없다.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원래부터 있는 것으로 증명의 대상이 아니다.
세상의 이치를 하나씩 논증하다 보면 끝도 없는 논증의 무한루프에 빠질 수 있다. 그래서 모든 것에는 기본적인 대전제가 필요하다. 초기 물리학에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물질의 기본단위로 원자라는 것을 상정한 것처럼 플라톤은 모든 사물의 근본적인 존재 원형으로 이데아를 제시했다. 이는 신플라톤주의를 도입한 교부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학을 받아들여 조금 진일보한 스콜라철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여기다가 대놓고 토를 달아버렸다.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이다. 이 문장에서 ‘생각’이나 ‘존재’ 만큼이나 중요한 단어가 바로 접속사 ‘고로’ - donc이다.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주장은 그냥 그대로 있던 존재 Being가 가진 의미를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이것이 인식론의 탄생이다.
흔히들 칸트가 존재 Being 중심의 인식을 인간 중심으로 바꾸어 놓으면서 근대미학이 탄생했다고 보고 있지만, 사실은 데카르트가 먼저 던진 이 화두를 이어받은 칸트가 인식론을 정립하며 서양의 형이상학은 신의 존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식의 중심을 대상이 아닌 인식을 하는 주체로 보았다. 참과 선, 존재와 표상을 결정하는 주체를 신에서 인간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인식론을 완성한 것은 칸트이지만 그 인식론을 한마디로 간결하게 정의한 것은 데카르트의 저 유명한 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다.
물론 이 말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먼저 했다는 썰도 있다. 하지만 인생은 역시 타이밍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너무 빨랐다. 당시의 시대정신은 신이 아닌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인식론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
교황만이 유일권력이었던 중세와 달리 절대왕정이 들어서면서 여러 막의 안전장치를 갖게 된 철학자들은 이제 조금씩 사상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중세에는 기독교 세계에서 교황에게 파문을 당하면 그대로 끝이었지만 이제 능력만 된다면 이 왕의 눈밖에 나도 저 왕에게 가서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결과물이 교부철학자들과 스콜라 철학자들이 천 년에 걸쳐 가다듬은 ‘존재에 대한 논증없는 동의’를 뒤집어 엎은 데카르트의 대담한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는 안전한) 발언이었다. 물론 이는 철학자 한 명이 세상을 바꾼 것이 아니라 적절한 시점에 시대의 변화에 맞는 화두를 던진 것이 먹혀든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데카르트의 발언은 자연과학의 발전에 따라 속절없이 무너지는 교황의 권위를 보며 이제 신학으로부터 독립할 마음의 준비를 끝낸 철학계로부터 격한 환영을 받으며 사회 각계에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서양의 철학은 신학과 철학의 잘못된 만남이었던 형이상학적 이원론에서 서서히 벗어나며 예술계에도 일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인식론의 날개를 달고 안드로메다 너머로 날아가버린 철학
교부철학자들이 되살려낸 신플라톤주의의 기반 위에다가 아랍에서 역수입된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식해버린 스콜라 철학자들 덕분에 서양 철학에는 영혼과 신체를 명백하게 분리한 플라톤의 주장과 영혼과 신체가 하나임을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이 서로 뒤섞이게 되었다.
데카르트와 칸트 이후에는 여기에 인식의 대상과 주체에 대한 논쟁이 더해지며 가뜩이나 형이상학적이던 서양의 형이상학은 아예 현실의 대지에서 발을 뗀 채 머나먼 무지개 나라로 돌아올 수 없는 긴 여행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요즘 트렌드에 맞게 인문학을 한번 접해보겠다고 유명한 철학서의 한국어 번역본을 펼쳐든 많은 이들은 첫장부터 ‘인식의 주체가 대상을 느끼는 방식이 어쩌고’, ‘감각적 직관이냐 절대적 인식이냐’, ‘우리의 마음이 대상을 직접 재현하는지’, ‘지각의 대상이 형상인지 감각인지’, ‘대상은 인식하는 순간 파괴된다’ 등등 도대체 그 비싼 프랑스 밥을 먹고 왜 이런 논쟁을 하면서 일생을 허비할까 싶은 벙벙한 말장난에 질려 바로 책을 탁 덮고 넷플릭스를 튼 경험이 한 두번 쯤은 있을 것이다.
이 뜬구름 잡는 말장난들은 다름아닌 존재론의 논증없는 이데아에 반기를 든 데카르트와 칸트에서 파생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인식론의 각론들이다. 문학, 건축, 영화 등 사회 각계로 그 뿌리를 뻗어나간 이 인식론의 각론들은 오늘날의 예술에도 역시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당연히 화두를 던진 데카르트 혼자서 이 후 수백년간 이어져 내려온 인식론을 완성한 것은 아니다. 사실 데카르트가 제시한 인식은 과학적 이성에 기반한 것이었다. 데카르트는 예술에도 수학적 명료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자칫 신의 존재 못지 않게 예술에 족쇄로 작용할 수 있던 이런 과학적 인식론은 후대의 사상가들에 의해 많은 부분이 수정, 보완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근대 미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바움가르텐이다. 미학을 철학으로부터 독립시킨 이 철학자는 데카르트의 과학적 인식에 감성적 인식을 추가하여 현대의 예술이 고대의 수학적 황금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였다.
인식의 주체를 존재가 아닌 인식하는 인간으로 돌려놓고 또 인간의 인식을 과학적 인식과 감성적 인식으로 구분한 철학자들이 바로 오늘날의 서양철학책들을 ‘지식이란 외부 감각을 받아들이는 것이냐 머리로 지각하는 것이냐’, ‘인식하는 자와 인식되어지는 대상 간의 관계’ 같은 인식론의 각론에 대한 벙벙한 논쟁들로 꽉꽉 채운 주범들이다.
이런 새로운 사상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앞서 말한대로 교회 권위의 추락이었다. 현실의 왕들이 교회로부터 권력을 되찾자 먼저 신학에 발목 잡힌 채 스콜라 철학같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적당히 섞은 반반철학이나 만들어 내야 했던 철학이 천편일률적인 존재론 사상에서 탈피하기 시작했다.
문학과 예술도 곧 큰 형님인 철학의 뒤를 따랐다. 신대신 왕의 권위를 찬양해야 했지만 굳이 존재와 표상, 빛과 어둠이라는 이원론에 집착할 필요는 없어진 것이다.
인식론이 예술에 가져온 변화
존재, 즉 Being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제조건을 단 것이 어떻게 예술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는 말일까?
데카르트 이전까지 예술의 목적은 대상의 존재 Being을 구현하여 현실에 표상 Representation하는 것이었다. 그 대상이 빛과 어둠이나 선과 악으로 대변되는 형이상학적 이원론 (중세)이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고 우리의 이상에서만 존재하는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존재 (르네상스)이건 간에 말이다.
이 후 그리스 조각을 보고 잠시 넋이 나갔던 예술가들이 정신을 추스리며 그 대상이 루벤스나 렘브란트의 그림처럼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현실적인 인물로 바뀌었지만 이 때까지도 예술의 본질은 여전히 대상의 존재 Being을 성심성의껏 묘사하는 것이었다. 주제는 바뀌었지만 본질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철학계에서 출발한 인식론이 사회 각분야에 받아들여지면서 예술계에서도 ‘대상의 존재를 그대로 구현하는 것’이 아닌 ‘ 예술가가 느낀대로 표현하는 것’ 이 예술의 본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스 모방에서 탈피한 현실의 인물: 바로크>
Candaules Showing His Wife to Gyges, Jacob Jordaens 1646,
Nationalmuseum Stockholm
<작가가 느끼는 인물: 인상주의>
목욕하는 사람들, Paul Cézanne
1894-1905, The National Gallery
물론 이러한 설명은 동양이나 이슬람의 예술이 아닌 어디까지나 중세와 근대 서유럽의 예술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서유럽이라는 것도 기독교 문화라는 공통의 정체성은 있으되 그렇다고 모조리 하나로 뭉뚱그릴 지역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것이 플랑드르 회화로 대표되는 네덜란드 지역의 미술이다. 뜬금없이 유럽의 작은 소국 네덜란드가 인접한 프랑스나 독일 같은 대국들을 제치고 서양미술사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 이유가 바로 카톨릭과 교황의 간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네덜란드의 상인들은 교황으로부터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위해 신교를 택했다. 그리고 온전히 자신들의 능력으로 축적한 부에 이 정치적, 종교적 자유를 담아 예술로 구현했다.
플랑드르 회화는 동시대까지 여전히 주구장창 천지창조와 수태고지만 그려대던 이탈리아 회화와는 달리 맨주먹으로 일어선 자기 자신들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마치 김홍도 풍속화의 채색버젼으로 보이기도 하는 브뤼헬의 그림들은 신이나 천사, 왕과 귀족이 아닌 바로 일상 속의 자신들을 그린 것이었다.
<자신들의 일상을 그린 플랑드르 회화>
Children’s game, Pieter Brugel 1560,
Kunsthistorisches Museum
히에로니무스 보스 같은 화가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작가의 상상 만으로 괴수와 지옥이 담긴 3연작화 – 쾌락의 정원을 남겼다.
배경 지식없이 이 그림을 처음 본 사람들은 바로 살바토레 달리의 초현실주의 그림이나 20세기 현대미술을 떠올리기 일쑤이지만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1450년에 태어났다. 르네상스 미술을 이끈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 보다 무려 30년도 더 전에 태어나서 20세기 같은 그림을 남긴 것이다.
보스의 그림을 보다보면 정말 시간여행자라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15세기에 미리 그린 20세기 현대회화>
[히에로니무스 보스 ‘쾌락의 정원’ 일부, 15세기 말, 프라도 미술관 소장]
하지만 로만카톨릭이 지배하던 서유럽 전체로 보면 이미 데카르트가 태어나기 백년도 더 전에 자체적으로 인식론을 구현했던 플랑드르 회화는 주류가 아닌 예외적인 일부였을 뿐이다.
유럽 예술의 주류는 여전히 데카르트와 인식론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