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등된 신, 천사
강등된 신, 천사
그런데 구약의 일원론과 신약의 이원론을 짬뽕시키는 이 대목에서 교부철학자들의 잔머리가 빛을 발한다. 악의 신을 신이 아닌 천사로 강등시킨 것이다.
기본적으로 다원론인 그리스 신화나 이원론에 기반한 불교에는 지옥을 관장하는 신이 존재한다. 물론 스스로 성불하면 되는 초창기의 불교는 아예 무신론에 기반했지만 신이 필요한 인도의 민중은 역시나 불교의 선배격인 힌두교의 여러 신들을 받아들여 현재의 불교는 다신교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스에는 하데스가 있고, 불교에는 염라대왕으로 대표되는 열명의 시왕이 지옥을 관장한다. 이들은 모두 신이다. 지옥의 신인 하데스는 아예 바다를 관장하는 포세이돈과 함께 주신인 제우스의 형제로 나온다.
기독교와 신구약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조로아스터교에도 선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와 그의 아들이자 악의 신인 앙그라 마이뉴가 존재한다. 탄생과 발전의 시기가 교부들이 활약한 시기와 정확하게 겹치며 중세의 기독교와 서로 많은 부분을 주고 받은 마니교 역시 동등한 레벨인 선의 신과 악의 신이 한판 승부를 벌인다.
반면 기독교는 구약은 물론이고 이원론을 도입한 신약에도 지옥의 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 악의 신이라고 할 수 있는 사탄은 하나님과 같은 신이 아니라 그보다 한급 아래인 천사와 같은 레벨이다. 기독교에서 사탄은 타락한 천사라고 명확히 선을 긋고 있다.
유일신 체계를 깨뜨릴 수는 없는 기독교 입장에서 이원론을 도입한다며 자칫 악의 신까지 그대로 들여왔다가는 교리가 꼬이는 것은 둘째치고 아예 구약을 통째로 다시 써야 하는 상황에 이를 수도 있다. 그래서 머리를 쥐어짜낸 끝에 나온 해결책이 악의 신을 천사와 같은 계급으로 강등시키는 것이었다.
악의 신을 천사와 같은 계급으로 분류했으니 이제 그 천사들 간에도 등급을 나누는 작업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다신교에서는 각 신들 간의 서열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최고신과 그의 친인척들인 최고 서열의 신들, 그리고 기타 잡신들이 존재한다. 현실 세계의 왕과 왕족, 귀족으로 볼 수 있다.
교부들이 민중들에게 친숙한 이교도의 신을 사탄, 타락한 천사라고 규정하게 되자 이에 따라 커룹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주로 성전이나 궁전 입구에서 문지기 역할을 하는 반인반수로 묘사되는 괴수, 이집트의 스핑크스도 커룹의 일종이다) 같은 잡신들도 중세 유럽에 와서 천사 카테고리에 편입이 되었다.
언약의 궤를 지키는 천사 – 커룹, 17세기 영국 삽화
아시리아의 커룹, The BAS Library
성경에는 나오지도 않는 이 천사들의 계급을 만들기 위해 교부철학자들은 역시나 인근 고대 종교들을 닥치는 대로 뒤져 천사들의 서열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만들었다.
이런 노력의 대표적인 결과물이 초대 파리 주교인 디오니시우스가 만든 구품론이다. 구품론은 천사들의 계급을 9단계로 나누어 1단계인 치품천사 (熾品天使, Seraphim)부터 9단계인 일반 천사까지 묘사하였다.
디오니시우스의 분류에 따르면 악마가 된 타락한 천사, 루시퍼는 세라핌, 즉 1단계인 최고천사였다. 인근 종교에서는 으뜸신과 맞장 뜨는 반열에 있는 것이 악의 신이니만큼 밉다고 맘대로 강등시킬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의외인 것이 이 분류에서 스핑크스와 같은 커룹은 루시퍼 바로 아래로 2번째인 지품천사 (智品天使, Cherubim)이고, 기독교인들에게 친숙한 가브리엘이나 미카엘은 오히려 끝에서 두번째인 대천사 (大天使 Archangels)이다.
Archangels를 우리말로 대천사라고 하니까 마치 대법원장처럼 천사들 중에 가장 높은 천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제일 말단의 9품인 일반천사 바로 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메신저 역할이나 하는 천사이다.
인간들에게 가서 허드렛 일이나 도와주는 하급천사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친숙할 뿐이다. 그러니까 대천사 가브리엘은 스핑크스 앞에 가면 눈부터 깔아야 할 정도로 커룹과 대천사의 계급차이는 크다.
달리 해석하면 우리말로는 다 천사라고 하지만 정작 Angel - 안젤루스라는 단어는 디오니시우스의 분류에서는 8단계와 9단계에만 쓰인다. 1단계에서 7단계까지는 실제 우리가 생각하는 천사 - Angel라기 보다는 인근 종교에서 영입한 악의 신과 잡신들이기 때문이다.
천사를 우러러보고 스핑크스 같은 잡신들을 낮춰보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정서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하지만 같은 문화권에 속한 다른 신들에 익숙한 당시의 민중들의 시각으로 보면 수시로 천신과 맞장 뜨는 악의 신을 하나님의 심부름꾼에 불과한 Angel보다 밑에 두는 것은 너무 억지스러운 것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 디오니시우스의 분류를 참고해 나름의 천사 계급도를 만들었고, 12세기 후기 교부철학자로 분류되는 마이모니데스는 여기에 한단계를 더 추가해 10계급을 만들었다.
성경에는 나오지도 않는 이 천사들의 위계라는 것이 어차피 요즘 유행하는 핸드백이나 시계 계급도처럼 작성자들의 뇌피셜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오메가를 롤렉스와 동급으로 보느냐 한급 아래로 보느냐를 가지고 시덕들의 의견이 분분한 것처럼 천사들 역시 작성자에 따라 그 계급은 마냥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했다.
앞서 말한 커룹은 디오니시우스의 구품론에서는 넘버투의 자리를 지켰지만 교부철학의 시대 막판인 마이모니데스쯤 오면 10단계 중 9단계로 추락한다. 더욱 극적인 것은 디오니시우스가 천사 중 서열 1위로 만들어 주었던 치품천사 – 세라핌의 추락이다.
천국에서 쫓겨난 후 사탄이 되었다고 하는 루시퍼나 야훼의 영원한 맞수 바알제붑으로 대표되는 세라핌은 불과 수백년 만에 천사들의 세계에서 그 서열이 1위에서 5위로 추락한다 (물론 저 천상에서 이루어지는 실제 천사들끼리의 서열놀이가 어떤지 우리가 알 길은 없다. 이 역시 작성자의 뇌피셜일 뿐이다). 한 때 유일신과 한판 승부를 벌이던 악의 신의 처절한 몰락이 아닐 수 없다.
요즘 화려한 춤실력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걸그룹 르세라핌 (LE SSERAFIM)은 그룹 이름을 한 때 서열 1위였던 악의 신에서 따왔다. 가뜩이나 쎈 이름인 세라핌 앞에 여성 정관사 라 (La)가 아닌 남성 정관사 르 (Le)를 붙여 파워풀한 댄스가 돋보이는 걸그룹에 더욱 어울리는 팀명이긴 하지만 결국은 정상의 자리에서 추락한 원조 세라핌의 선례를 따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기독교가 유럽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고, 디오니시우스의 천사 계급도 오리지날이 나온 후 5백년 이상이 흐르면서 유럽 민중들 사이에 선의 신과 동등한 레벨에서 맞장뜨던 악의 신이나 중근동 잡신들에 대한 기억이 서서히 지워진 것이다. 이제 루시퍼는 물론이고 스핑크스 쯤은 대천사 미카엘 밑으로도 강등시킬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악의 신을 천사로 강등시키는 데에 성공한 신약은 제일 마지막 장에서 죽음과 저승도 이제 모두 유일신인 하나님의 영역이라고 명확히 선을 긋는다.
‘나는 죽었지만 영원토록 살아있다. 나는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있다’
요한계시록 1장 18절
악마의 모방과 영지주의 탄압
그런데 교부들의 잔머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조로아스터교나 마니교를 비롯한 수 많은 중근동의 고대종교들을 적당히 버무려서 신약의 틀을 잡았으니 적어도 당시에 살던 사람들이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성경의 일화들은 사실 인근 지역의 설화에서 많은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여성 사제가 처녀의 몸으로 임신을 했다. 남몰래 아기를 낳았지만 여사제의 신분으로 대놓고 아이를 기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갈대 바구니에 아기를 담고는 강물에 띄워 보냈다. 간신히 구조된 아이는 결국 왕위에 오른다.”
성경을 조금이라도 읽어본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과 모세의 이야기를 짬뽕한 것처럼 들리겠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무려 2천년도 더 전인 아카드 제국 사르곤 1세의 출생설화이다.
물 속에서 세례를 베푸는 세례 요한은 신약에서 예수님에 버금가는 메인 캐릭터이 지만 요한 John이라는 이름이 원래 그리스에서 물의 신을 담당하는 오아네스 Oannes가 히브리어 요하난 Yohanan으로, 다시 라틴어 요하네스 Johannes를 거쳐 영어의 존 John과 우리말의 요한으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은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쉬쉬할 비밀거리도 아니다. 세례 요한의 조상격인 물의 신 오아네스의 기원은 다시 수메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외에도 삼위일체의 뿌리가 되는 조로아스터교의 삼부자 전설이나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내려와 인간들을 위해 대신 죽었다는 기독교의 핵심 스토리,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거나 나귀를 타고 성문에 들어온 선지자,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이적, 동방박사 등등 신약의 수많은 일화들은 모두 주변의 고대 종교에서 차용한 것이었다.
심지어 이집트에 가면 12월 25일에 태어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으로 내려온 신의 아들도 있다. 그러니 당시 교부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기 이전에는 뭐가 있었나요’라는 뻔한 질문 외에도 수시로 왜 예수님 이야기랑 똑 같은 스토리가 이집트에도, 시리아에도 있냐는 신자들의 질문에 답을 해야 했다.
여기서 교부들은 다시금 창의력을 발휘한다. 한마디로 악마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것을 알고 예수님이 장차 행하실 이적들을 미리 모방해 이교도들의 경전에 기록을 남겼다는 신박한 발상을 해낸 것이다.
대표적인 교부이자 순교자인 유스티누스가 처음 주장한 이 ‘악마의 모방’ 컨셉은 곧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명을 받고 기독교 초기 역사를 집대성한 유세비우스에 의해 깔끔하게 정리되어 당시만 해도 사방 천지에 널려있던 예수님 스토리와 고대종교 간의 유사성에 대한 해답으로 민중들에게 제시되었다.
물론 교부들도 그리 순진하기만 한 사람들은 아니어서 이런 억지 반론이 교회 말고는 마음 둘 곳 없는 나이 많은 과수댁을 제외하고는 먹혀들리 만무하다는 것 쯤은 잘 알고 있었다. ‘악마의 모방’은 신자들의 뻔한 질문에 꿀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 둘러대기 위해 나온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교부들은 자신들이 주요 개념을 빌려온 주변 고대종교들을 모조리 이단으로 몰아 탄압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원시 기독교 일파 중에서 이원론의 원조레시피를 충실하게 받아들여 선의 신과 악의 신을 같은 반열에 올려놓은 계파들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며 모조리 때려잡았다. 현재의 기독교가 ‘이단’이라는 단어에 보이는 알러지 반응은 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회의 권력수호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척척 해내었던 교부들은 이렇게 그리스와 이집트, 시리아 등지에 자생하던 이원론적 기반을 가진 고대 종교들을 모두 뭉뚱그려 ‘영지주의 Gnoticism’라는 라벨을 붙혀 이단으로 선언했다.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영지주의에 대한 설명들을 보면 문자중심, 즉 복음서 중심의 기독교와 신비주의에 기반한 타 종교 사이의 갈등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신비주의에 대한 알러지 반응만으로 이단에 대한 기독교의 이 뿌리깊은 거부반응과 폭력성을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지금도 방언의 은사로 대표되는 신비체험은 현대 기독교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부흥회에 나와 언제 어떤 일을 겪으며 구주를 영접하게 되었다며 신앙 간증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신비주의에서 말하는 영적 체험을 한 사람들이다. 나 역시 주일마다 기타치고 복음성가 부르던 주일학교 고등부 시절, 부흥회 중간에 방언을 받은 적이 있다. 원래 종교라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는 신비주의를 밑바탕에 깔고 가는 것이지 않은가?
영지주의로 통칭되는 이단의 성소를 때려 부수고 경전을 불에 태운 것은 신비주의에 대한 단순한 거부반응이 아니라 인근의 고대종교들에서 이원론 뿐 아니라 예수님에 관한 수많은 일화까지 고대로 가져다 베낀 ‘라벨갈이에 대한 증거인멸’이었다.
또한 개개인이 영적 체험을 통해 신과 직접 소통하는 방식은 중간 매개자인 성직자의 역할을 축소시켜 교회의 권력을 약화시킬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교회와 성직자의 권력 강화를 위해 이 어려운 일들을 해낸 교회가 영지주의를 그냥 내버려둘리 만무했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신의 존재와 왕권의 강화
하지만 세상만사가 기획자의 의도대로 언제까지나 순조롭게 흘러갈리가 만무했다. 이원론을 도입하며 처벌과 보상을 사후세계로 미루어는 놓았지만 역설적으로 민중은 수시로 눈에 보이는 것을 요구했다. 그렇다고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기도만으로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고 팔을 들어 태양을 멈추게 할 자신이 없는 중세의 신부님들은 결국 눈에 보이는 이적으로 자연재해를 선택했다.
태풍과 지진, 홍수와 전염병은 모두 타락한 인간을 벌하는 신의 징벌이 되었다. 흑사병이 퍼지자 신심 깊은 신자들은 몹쓸 병에 걸린 자신의 죄를 회개한다며 거리에서 재를 뒤집어 쓰고 고행을 하면서 사방천지를 돌아다녀 수퍼전파자가 되었다.
이는 얼마든지 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는 주장이었다. 사후 세계가 없는 구약에서 여호와는 타락한 인간을 벌하고자 홍수를 내렸고, 파라오가 유대민족을 풀어주지 않자 메뚜기떼와 전염병을 보냈다.
중세의 성직자들은 이런 성경내용을 근거로 모든 자연재해를 신이 내리는 징벌로 진단하고, 잘못을 회개하려면 헌금을 바치라는 금융처방을 내렸다.
르네상스 이후 자연과학이 발달하여 태풍과 전염병의 원인을 인간이 이해하게 되자 이 치트키는 고스란히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자연재해가 신의 진노가 아니라면 착한 일 하고 헌금 많이 내면 천국에 가고 나쁜 일 하고 신부님 말씀 안 들으면 지옥에 간다는 이원론적 주장은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일까?
일원론과 이원론 양쪽에서 필요한 것만을 체리피킹하여 사후세계에 대한 기대와 자연재해에 대한 두려움에 쌍끌이로 의존하던 중세 기독교의 권위는 이렇게 해서 과학의 발전과 함께 땅에 떨어졌다. 그러자 오늘 당장 피부에 와닿는 상을 주고 벌을 줄 수 있는 현실의 왕들에게 권력이 돌아간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르네상스로 교황과 교회의 권위가 떨어지자 유럽 각국에 절대왕정이 시작된 것은 단순한 타이밍의 우연이 아니었다. 한 때 카노사의 굴욕 (성직자 임명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교황이 파문한 사건)으로 대표되던 신권에 굴복한 왕권은 르네상스를 기점으로 그 주도권을 되찾아와 시민사회가 등장하기 전까지 절대왕정이라는 단어에 걸맞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예술 역시 이런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엄숙하고 경건한 중세의 고딕양식에서 그리스 로마 고전을 베끼던 르네상스 양식을 거쳐 곧 절대왕정의 취향에 맞는 웅장한 바로크 양식으로 변화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시대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단지 신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에서 왕의 권위를 찬양하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예술은 그 자체로 자신들의 사조를 만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는 철학에서 빌려오는 것이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