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예술을 가스라이팅하다 V

살아남기 위한 기독교의 처절한 노력

기독교, 세상을 거저 지배하게 된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예술과 철학뿐 아니라 서구 문화의 모든 부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신학을 앞세워 철학을 하수인으로 부리고, 또 하수인인 철학이 사용하는 도구로 예술을 이용한 기독교의 이런 모습은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지배 종교의 한 단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기독교가 이런 가스라이팅을 행한 이유는 자신이 모시는 유일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민초들 위에 군림해서 헌금을 더 걷으려는 선민의식의 발로만은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조금 더 원초적인 생존본능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실 기독교의 뿌리인 유대교는 이집트나 바빌론, 수메르 같이 기라성 같은 고대 중근동의 일진들 사이에서 늘 맞고 다니던 소수민족의 마이너 종교였다. 더군다나 초창기 기독교는 이런 아싸 종교에서조처 한번 더 갈라져 나온 숱한 아류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물론 교회에서 목사님께 한 때 미미하기 짝이 없던 기독교가 오늘날 전세계를 지배하는 메이저 종교가 된 배경에 대해 질문을 하면 신이 난 목사님은 이야 말로 하나님의 영광이고, 미개한 시절에는 온갖 잡신들이 난립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나뿐인 진정한 신이 대세가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어려운 일을 해내기 위해 초기 기독교 사제들은 수백년에 걸쳐 정말이지 몸을 갈아넣는 수고를 다한 덕분에 교부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얻게 되었다.


서양의 기독교가 신학을 통해 철학을 지배하게 된 배경에는 단순한 신정일치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 이상으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투쟁해온 기독교의 역사가 담겨져있다.


그리고 이 과정을 이해하면 왜 형이상학적 이원론이 서구의 사상에서 그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예술까지 지배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기독교, 생존을 위해 주변 종교들과 타협하다


기독교의 모태가 되는 유대교는 기본적으로 일원론에 기반한 유일신을 숭배하는 종교이다. 유일신이다 보니 염라대왕이나 하데스 같은 또 다른 신이 지옥을 다스리는 세계관이 나오긴 어려웠다. 유대교는 철저히 현세에 입각한 종교였다.


따라서 이러한 구약의 일원론은 그 태생상 천국과 지옥이라는 개념이 없어 민중들에게 먹혀들기가 힘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민중은 착한 일 하면 천국가고 나쁜 짓 하면 지옥간다는 단순한 선악구도를 선호한다. 우주의 기원과 신의 존재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논쟁은 그저 일부 식자들의 지적 유희일 뿐이다.


그러다보니 구약시대 유대인들은 제사장의 눈을 피해 수시로 인근의 다른 고대 종교들을 기웃거렸다. 당시의 구약성경은 온통 유대인들을 빼가려는 바알제불과 이런 신자들을 단속하려는 야훼 간의 신경전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결국 교부들은 예수 사후 남아있는 두루마리들을 넣을 거 넣고 뺄거 빼면서 신약을 정리할 때 당시만 해도 유대교 보다 훨씬 잘나가던 인근의 조로아스터교 같은 타종교에서 이원론을 받아들여야 했다.


교부철학이 탄생한 이유가 교황의 권위를 강화해 현실의 왕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민중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어려운 라틴어를 몰라도 신부님의 쉬운 이야기 몇마디와 성화 몇 점으로 민중들에게 쉽게 먹힐 수 있는 선악 구도가 기독교에 도입된 배경이다. 원조인 유태교에는 없던 개념이다.


따라서 성경을 쭉 읽어보면 신의 본성과 선과 악에 대한 구약의 논지가 신약에 들어와서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쉽게 말해 구약의 야훼는 분노도 하고 질투도 하며 전쟁에 패한 상대방 부족의 갓난아기들까지 몰살시키라는 명령을 서슴지 않는, 선과 악을 모두 한 몸에 지닌 일원론적인 신이었다. 신은 하나이기 때문에 악의 신이 별도로 존재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교부들이 짜집기 한 신약부터 인근 고대종교들의 이원론적 사고가 보충되기 시작한다.


신구약의 이러한 입장변화는 성경 구절에서 아주 잘 나타난다. 창세기는 ‘카인을 해친 자가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라고 사자후를 토하지만, 마태복음으로 가면 나에게 죄를 지은 형제를 일곱번 용서해주면 충분하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일곱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일갈한다.


그런데 구약의 일원론에 인근 종교의 이원론을 덧붙여 신약을 만들던 교부들도 갑자기 야훼의 성격을 바꾸자니 구약을 통째로 다시 쓰지 않는 이상 앞뒤가 안맞아도 너무 안맞는 상황에 봉착했다. 그래서 예수님이라는 하나님의 현신인 동시에 아들이라는 애매한 존재에 절대적인 선의 속성을 부여한다.


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성령이라는 개념 역시 조로아스터교의 주신인 아후라 마즈다와 두 아들 – 앙그라 마이뉴와 스펜타 마이뉴의 스토리에서 차용한 것이다. 선의 신 아후라 마즈다에서 악의 신 앙그라 마이뉴가 태어났지만 쌍둥이 형제인 스펜타 마이뉴가 성스러운 영을 담당하며 인간들을 사랑으로 감싸고 보호한다.


교회 좀 다녀본 사람은 이쯤에서 눈치챘겠지만 서기 321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공인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썰은 조로아스터교의 삼부자 전설을 이름만 바꾸어 통채로 옮겨놓은 것이다.


카톨릭의 이러한 노력은 모두 진리를 향한 탐구열이나 인류애에 기반한 타 종교와 문화에 대한 관용 정신의 발로가 아니라 교회 권력의 안정을 위해서였다. 개신교에 비해 카톨릭이 타 종교에 상대적으로 관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카톨릭은 살아남기 위해 주변의 다른 종교들에게 문호를 개방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개신교는 애초에 이런 카톨릭에 반기를 들고 나온 신흥 종교이기 때문에 타 종교에 배타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니 개신교는 카톨릭의 모든 수호성인과 축일 따위는 인정하지 않는다. 반대로 교리 강화를 위해 시작부터 중근동 고대종교의 주요 개념들을 기독교에 도입한 카톨릭의 교부들에게 유럽 토착종교의 신들에게 기독교 배지를 달아 수호성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 쯤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듯 교부들은 수많은 복음서 중에 입맛에 맞는 부분들만 취사 선택하고, 인근 고대종교들과 그리스 철학에서 필요한 부분을 가져와서 일원론에 기반한 구약의 유일신과 중동과 그리스의 이원론을 버무린 신약을 만들어내었다.


종교에서의 이원론은 화도 내고 질투도 하는 일원론의 신을 보며 어느 장단에 맞춰야하는지 헷갈려하는 민중들에게 착한일 하면 천국 가고 나쁜 짓 하면 지옥 간다는 명확한 구도를 만들어 포교에 도움을 주었다.


이게 왜 그렇게 강력한 치트키였냐하면 현생에 대한 모든 보상과 처벌을 누구도 직접 가서 확인할 수 없는 사후세계로 미룰수 있기 때문이었다.


천국과 지옥, 구약성경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단어


다른 많은 종교들처럼 기독교에서도당과 지옥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배당 잘나오고 꼬박꼬박 십일조 바치면 천당가고 나쁜짓 하면 지옥간다는 말은 설교 시간에 흔히 들을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구약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아도 천국이나 지옥이라는 말은 단 한군데에도 나오지 않는다.


구약에서 사후세계는 기껏해야 선지자 엘리야가 병거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대목에서 끝이 난다. 병거타고 하늘에 올라간 선지자는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기독교도들에게 친숙한 표현대로 하나님 우편에 앉았을까? 구약은 여기까지 자세히 말해주지 않는다.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표현은 신약에 와서야 도입된 개념이다. 그리고 그 출처는 천국과 지옥을 명확하게 나누고 사후세계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조로아스터교였다.


프랑스의 종교철학자이자 ‘신이 된 예수’의 저자인 프레데릭 르느와르는 구약에서 죽은 사람은 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망각의 땅 (창조 이전의 being으로 돌아간다고 보면 된다, 드라마 도깨비에 나오는 무無로 돌아간다와 일치하는 개념이다)으로 간다고 생각하던 유대인들이 사후세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라고 잘라말한다.


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망각의 땅, 다시 한번 드라마 도깨비를 소환해보자. 검을 뽑고 소멸한 도깨비를 무無로 돌려 보낸 신은 ‘이 곳에는 나도 없다’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에게 사후 세계는 천국이나 지옥이 아닌 무無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천국과 지옥의 개념이 기독교에 완전히 자리잡게 된 것은 의외로 얼마되지 않았다. 기원후 6세기, 교황 그레고리우스 시대부터였다.


구원받고 천국가는 것이 궁극적인 믿음의 목적인 현대의 기독교도들에게는 얼핏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다.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신약을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에는 여전히 내세에 대한 개념이 약하다.


유대교에서 죽은 자들이 안식을 취하는 곳은 지옥이나 천당이 아닌 아브라함의 품이다. 그리고 심판의 날이 오면 모든 육신이 부활한다는 대목에서 유대교의 내세 개념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즉 아브라함의 품은 진정한 내세가 아니라 종말의 순간이 올 때까지 죽은 자들이 잠시 거처하는 곳일 뿐이다.


현세의 기적이 필요한 구약 VS 사후세계로 공을 넘긴 신약


이렇듯 사후세계의 개념이 없는 구약의 일원론은 당연히 모든 보상과 처벌을 현세에서 마무리지어야 했다. 그렇기에 구약의 선지자 엘리야는 바알제불의 제사장들과 현피를 뜰 수밖에 없었다. 양쪽이 모두 제단을 만들고 제물을 바쳐 각자의 신에게 기도를 올리면 이 중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받는 쪽이 승리한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바알제불의 제사장들이 한나절 내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심지어 옷을 찢고 칼로 자해를 하며 기도를 올렸지만 그들이 경배하는 바알제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이를 지켜보던 엘리야가 썩소를 날리며 여호와께 조용히 기도를 올리자 바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엘리야가 바친 제물은 물론이고 온종일 춤추고 노래하느라 진이 다 빠진 바알제불의 제사장들을 모조리 태워버렸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들에게야 아멘 소리가 절로 나오는 명장면이지만 로마를 무너뜨린 게르만족과 북유럽에서 내려오는 바이킹족들에게 복음을 전해야만 했던 중세의 교부들에게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북유럽 이교도들에게 이 책을 그대로 들고 가서 믿으라고 했다가는 똑 같은 요구를 할 것이 뻔했다. 중세 신부님들이 오딘의 제사장들을 상대로 엘리야 코스프레를 해야하는 것이다.


북유럽의 처연한 오로라 아래에서 뿔달린 투구를 쓴 바이킹 제사장들에 맞서 엘리야의 영광을 재현할 자신이 없는 교부들은 사후세계, 즉 천국과 지옥이라는 이원론을 신약에 도입하여 이를 슬쩍 피해갔다.

구약의 시대는 당장 눈앞에서 결판을 내야 하는 현피의 시대였지만 신약부터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이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로다’ (요한복음 3장 16절)라는 새로운 주장인 것이다.


이제 카톨릭 신부님들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라고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모든 심판은 죽고 난 후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주변의 다른 종교들이 모두 누려오던 이 편리한 개념을 기독교는 뒤늦게야 도입한 것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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