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예술을 가스라이팅하다 IIX

유럽 예술의 주류는 여전히 데카르트와 인식론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다



유럽 예술의 주류는 여전히 데카르트와 인식론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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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해야만 존재하는 것처럼, 내가 보아야만 예술의 대상도 존재하는 것이다. ‘


모네와 마네를 비롯한 인상주의 화가들이 바로 이런 인식론을 예술에서 잘 구현한 선구자들이었다. 원래의 대상이 어떤 색인지 어떤 모양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저 수련을 어떻게 보았느냐, 저 해바라기가 내 눈에 어떻게 보이느냐, 더 나아가 내가 저 하늘을 보고 어떤 생각과 느낌이 들었느냐가 더 중요해진 것이다.


19세기에 등장해 오늘날까지도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인상주의에서 인상 (Impression)이라는 표현은 원래 경멸의 의미였다. 당시 이들의 그림에 ‘인상’이라는 단어를 붙인 이유는 그때까지 예술가의 역할은 ‘존재 being’의 속성을 완벽하게 파악해서 현실에 충실히 ‘표상 reprenent’하는 것이었는데, 이들의 그림은 그 존재의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단지 순간적으로 눈에 스쳐가는 인상 Impression을 모사한 것에 불과하다는 경멸섞인 조롱이었던 것이다.


이런 초기의 경멸을 이겨낸 인상주의의 등장은 예술의 철학적 토대를 천년 동안 서구의 예술을 지배했던 존재론에 기반한 형이상학적 이원론에서 개별 화가들의 인식에 기반한 인식론으로 옮겨놓은 거대한 터닝포인트였다. 초현실주의니 추상이니 하는 현대의 미술사조들은 모두 인상주의가 인식론을 미술에서 구현하는 데에 성공하면서 등장할 수 있었다.


한 때 형이상학적 이원론에 기반한 미술에 익숙한 주류계층들에 의해 경멸의 의미로 쓰였던 이 인상주의라는 말은 인식론이 자리를 잡으면서 비로소 한 시대를 풍미하는 예술 사조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그런데 인상주의를 배척한 기존 미술계의 반응을 자기들에게 익숙한 전통만을 고집하는 단순한 꼰대들의 합창이나 흔한 신구 세력의 갈등으로 이해하는 것은 피상적인 해석이다.


인상주의에 대한 주류미술계의 경멸은 그 뿌리를 무려 플라톤까지 찾아 올라가야 한다.


당시 서구의 철학자나 예술가들이 ‘인상’주의를 경멸한 이유는 이미 이천년도 더 전에 플라톤이라는 대철학자가 ‘감각미는 순수하지 않은 가장 하등한 미’라고 결론을 내려주었기 때문이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양철학은 알프레도 화이트헤드의 말마따나 ‘플라톤의 주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인식론이 도입되기 전까지의 미학은 이데아론에서 주장하듯이 ‘존재’를 현실에서 ‘표상’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은 ‘국가’에서 침대를 예로 들면서 화가는 장인보다 열등하다고 설파했다. 침대라는 ‘존재’를 현실에서 충실히 ‘표상’한 것은 장인이 만든 실물의 침대이다. 화가가 그린 침대는 2D의 한계상 침대라는 존재의 특정 부분 만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화가가 그린 침대는 장인이 만든 침대보다 열등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미를 최우선으로 생각한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자들)은 당연히 시대의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오늘날 이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신플라톤주의에 입각한 궁극의 예술가는 3D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이데아론에서 파생된 존재론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던 당시 주류 예술계의 시각에서 볼 때 이천 년 전에 이미 ‘감각에 기반한 예술은 환영을 만들 뿐’이라고 플라톤이 명쾌하게 내린 결론은 알지도 못한 채 마치 자신들이 대단한 새로운 것을 발견한 양 설치는 인상주의자들은 어제 막 인터넷을 개통한 초딩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해묵은 주장은 데카르트와 칸트의 인식론을 계승 발전시킨 헤겔에 와서 완전히 박살나고 말았다.


근대 미학의 진정한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헤겔은 감각미가 자연미보다 하등하다고 주장한 플라톤을 반박한 수준에서 멈추지 않았다. 인간 이성의 역할에 주목은 했지만 여전히 자연미가 예술미보다 우위에 있다고 본 칸트마저 부정했다.


헤겔은 ‘미’라는 것은 정신적인 활동의 결과물이라며 아예 자연미를 ‘미’의 영역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그러자 데카르트와 칸트의 시절까지만 해도 조금은 애매모호했던 ‘예술에서의 인식의 역할’이 비로소 명확해졌다. 헤겔이 지금까지의 생각과는 달리 예술이란 존재의 표상이 아니며, 자연 (존재)를 단순히 모방 (표상)하는 것에는 영혼이 없다고 잘라 말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칸트에게마저 무시당했던 예술미를 미의 계급도에서 최상위에 놓고 예술이란 ‘절대 정신의 감각적 현현’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헤겔은 이 절대 정신이 무엇인지까지 명확하게 정의했다.


바로 신이 아닌 인간의 정신이 절대정신이다.


21세기의 현대미술가들이 플라톤과 헤겔을 읽었던 읽지 않았던 간에 오늘날의 추상회화들은 모두 헤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헤겔이 이렇게 진정한 예술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정의를 내려주고, 또 그 정의가 사회적으로 폭넓게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19세기의 인상주의를 거쳐 20세기의 추상화가 비로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예술가들은 더 이상 자신이 그리는 대상이 이상 속의 인물이건 현실의 오브제이건 상관없이 대상의 존재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모두들 내가 어떻게 느끼느냐, 내 눈에 어떻게 보이느냐에만 몰두하기 시작했다.


모두 데카르트의 담대한 발언, Je pense, donc je suis에서 비롯된 변화였다. 그리고 헤겔이 이 오랜 논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마리아와 예수의 '존재'를 표상하고자 한 피에타]

Pietà*, Annibale Carracci, 17세기, St. Nicolas Church



[내가 느끼는 대로 성모와 예수를 묘사한 피에타]


Pieta**, Oskar Kokoschka 1909, MoMA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당하고 돌아가신 예수님의 초콜렛 복근과 우람한 삼각근을 보라. 카라치는 17세기가 다 되도록 그리스 조각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반면 작가가 느끼는 대로 그린 코코슈카의 성모는 누가 보아도 마귀할멈 같은 얼굴이다.



이쯤에서 많은 사람들이 후설의 현상학을 떠올릴 것이다. 인식의 주체인 내 자신이 대상을 보고 무엇을 어떻게 느꼈는지, 그 의식에 대해서 탐구한다는 학문 말이다. 칸트 이래로 계속된 인식의 주체와 대상에 대한 논의를 정리하여 20세기 현대철학의 한 축으로 자리잡은 현상학은 코코슈카의 ‘피에타’에서 보듯이 작가가 의식했건 안했건 간에 현대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물론 어느 분야나 그렇듯이 작용에는 반작용이 뒤따랐다. 인상주의가 대세인 시절에 프랑스에서 태어나 인상주의가 미술의 전부인 줄 알고 그림을 그리던 르누아르는 별 생각없이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가 르네상스 시절의 그림, 특히나 라파엘로의 그림을 실물로 영접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라파엘로와 자신의 그림을 비교해보니 바로 현타가 온 것이다.


이 프랑스 인상주의 거장은 상상으로 떠올리는 천상의 존재를 절대적인 손재주로 현실에서 충실히 표상한 르네상스 거장들의 그림 앞에서 사방에 널린 필부들의 모습을 눈에 스쳐가는 순간의 인상으로 그려대던 자신의 예술에 한없는 초라함을 느낀다.


충격에 휩싸여 프랑스로 돌아온 르느와르는 한동안 존재를 충실히 표상하려는 르네상스로 돌아간 듯한 화풍을 보여주다가 말년이 되어서야 다시금 인상주의 화풍으로 돌아갔다.



[이탈리아에 가기 직전의 르느와르 화풍]



Dame au piano (1875), Pierre-Auguste Renoir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직후의 르느와르 화풍]


Les Grandes Baigneuses (1884), Pierre-Auguste Renoir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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