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예술을 가스라이팅하다 IX

철학의 폭주와 갈 길을 잃어버린 현대 예술

내가 연주한다, 고로 음악이 존재한다 - 고용주가 원하는 음악에서 음악가가 원하는 음악으로


미술과 함께 예술의 양 축을 담당하는 음악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닥치고 하나님의 은혜와 왕의 영광을 찬미하던 음악은 음악의 주체가 찬양받는 대상에서 듣는 청중 중심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하는 음악가 중심으로 변화하였다.


결국 현대음악에 와서는 청중이 아닌 그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의 개성과 예술세계를 드러내는 것이 본질이 되어버렸다.


신을 찬미하기 위한 단 하나의 목적에 따라 절제된 단성음악으로 반주도 없이 성가를 불렀던 고딕 시대의 음악은 르네상스 시절 다성음악이 시도되며 변화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절대왕정이 시작되자 왕들은 이를 보다 웅장하게 만들어 신이 아닌 자신들의 권위를 과시하는데에 쓰기 시작했다.


단조로운 단성음악은 경건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에는 적격이었지만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왕의 영광을 과시하는데에는 부족함이 많았던 것이다.


음악의 어머니로 추앙받는 헨델이 작곡한 수상음악 Water Music과 왕궁의 불꽃놀이 Royal Firework를 보면 그 시절의 분위기가 이해될 것이다. 독일에서도 시골인 하노버를 떠나 대도시 런던에서 성공하고자 추노를 단행했던 헨델은 바로 그 하노버공이 짠하고 영국의 조지 1세로 등장하는 기막힌 상황에 처하자 필사적으로 고용주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템즈강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조지1세를 위해서는 수상음악을 작곡하고,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승리한 조지2세가 불꽃놀이로 자축하자 이를 위해 왕궁의 불꽃놀이를 작곡한 것이다. 헨델은 왕의 마음에 들기 위해 최대한 다양한 악기를 사용해 현란하면서도 화려한 음악을 만들어 내었다. 조지 1세는 헨델이 자신에게 다시 아양을 떨기 시작하자 곧 예전 일을 용서해주었다.


이런 왕실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편성이 필수적이었다. 원래 오페라 시작 전 청중들의 주의를 모으는 역할에 불과했던 관현악곡이 웅장한 교향곡으로 변모하게 된 배경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번째는 모든 악기를 빠짐없이 다루는 마스터피스를 작곡하여 거장으로 인정받고 싶은 음악가의 욕심이다. 그리고 여기에 이들 음악가를 고용하고 있던 영주들의 경쟁심이 더해졌다. 이들 공작과 백작들은 자신의 궁전을 찾은 귀족들에게 보다 큰 규모의 악단과 여기서 뿜어져 나오는 웅장한 소리를 들려주고 싶어했다. 이 교향곡을 처음 성공적으로 완성한 사람이 자타가 공인하는 궁정의 음악하는 하인, 하이든이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본질적으로 중세나 비슷했다. 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에서 왕의 권위를 찬양하는 것으로 바뀌고, 교회에서 쓰이던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의 음악에서 왕의 권력을 과시하는 웅장한 분위기의 음악으로 변한 것 뿐이다. 음악가 입장에서 볼 때는 단지 고용주가 교회에서 왕과 영주로 바뀐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산업혁명이 시작되어 절대왕정이 서서히 막을 내리고 시민사회가 도래하면서 음악과 미술에 대한 수요가 사회적으로 동시에 폭발했다. 산업화 덕분에 시민사회의 등장배경인 부르주아지들의 주머니가 귀족 못지 않게 두둑해지고, 일반 평민들도 먹고 사는 것 이외에 문화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이를 소비할 수 있는 여윳돈이 생긴 것이다.


이 시민사회의 등장과 함께 음악계에서 유행하게 된 것이 자신의 기교를 마음껏 뽐내는 거장, 비르투오소의 등장이다. 만약 중세라면 교회에서 경건한 찬송가를 부르는데 그런 재주를 부렸다가는 마귀나 하는 짓이라고 화형을 당했을지도 모르고, 식후에 나른해진 왕이 낮잠을 청하는데 비싼 돈 주고 고용한 콜로라투라가 자장가에 현란한 기교를 섞어 두성발성을 내다가는 쫓겨났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비르투오소의 원조격인 파가니니의 현란한 기교를 본 대중들은 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이 경이로운 연주 실력을 얻었다고 수근대기도 했다. 이게 단순한 뒷담화가 아닌 것이 이런 소문 때문에 파가니니는 죽은 후에도 교회 묘지에 묻히지 못하고 수십 년간 지하 납골당에 방치되었다.


파가니니의 유해는 자신이 말년에 귀족들에게 공짜 연주를 조공하면서 남작으로 신분상승을 시켜준 외아들이 무려 30년 넘게 백방으로 힘을 쓴 후에야 교회 묘지에서 안식을 찾을 수 있었다.


비르투오스들의 등장과 함께 이제 미술과 함께 음악은 신을 찬양하거나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가 목적인 예술이 되어 음악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음악을 하는 사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낭만주의의 등장


이것이 바로 음악 뿐 아니라 미술, 문학 등 예술 전분야에 걸쳐 19세기를 제대로 강타한 낭만주의의 시작이다. 엄격한 목적의식에 따른 절제된 정제미를 강조한 고전주의와는 달리 낭만주의에서는 작가의 감성과 기호, 즉 주관적 예술혼이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이는 데카르트의 인식론을 계승한 칸트의 소위 삼대 비판서가 나온 1800년 전후의 시대적 배경과 일맥상통한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진을 다루는 제1철학이다. 실천이성비판은 선의 영역을 다루고 판단력비판은 심미적 영역을 다루고 있다. 진은 상위의 개념으로 진리를 다루는 영역이고, 선은 실천의 영역이며 아름다움을 뜻하는 미는 예술의 영역이다.


인식론이 자리를 잡으면서 진선미는 이렇게 서로 다른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 어찌보면 겨울에 눈내리는 뻔한 이야기 같지만 근대 이전까지의 진선미는 적어도 예술의 관점에서는 서로 구분이 되지 않았다. 예술은 단지 아름다움 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실천의 영역인 진과 선까지 담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철학에서는 결국 니체가 등장하여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이미 숨을 거둔 형이상학적 이원론의 관뚜껑에 대못을 박았다.


니체가 선언한 신의 죽음은 흔히들 이해하는 것처럼 단순히 종교에 대한 인간 이성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교부 시대 이래로 서양의 사상과 문화를 지배해온 형이상학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니체는 이원론에서 악을 담당했던 인간의 각종 욕망들을 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류 역사를 발전시킨 원동력으로 보았다. 성욕이 없었다면 인류는 멸종했을 것이고, 권력에 대한 욕망과 명예욕, 부에 대한 탐욕이 없었다면 인류는 아무런 기술적 경제적 진보 없이 여전히 선사시대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형이상학이 숨을 거두며 수세기에 걸쳐 자신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진과 선을 덜어낸 미는 이제 그 자신의 존재를 마음껏 뽐내기 시작했다.


음악가들은 이제 신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작곡해야하고, 또 왕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연주해야할지 시시콜콜 지시하는 사제나 군주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그저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싶어하는 대중을 상대로 음악가 본인 취향에 맞는 음악을 내키는 대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일반 대중들도 예술을 즐기기 시작하자 왕과 귀족들은 힘이 커진 시민사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시내 곳곳에 음악당과 오페라 하우스를 짓기 시작했고, 곧 귀족 못지 않게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지들이 이에 가세했다.


영화 파리넬리에서 보듯이 당대 비르투오소들의 인기는 지금의 BTS나 블핑 빰치는 것이었다. 클래식 공연장에서는 정숙해야 한다는 현재의 통념과는 다르게 공연장에 파가니니가 등장하면 여염집 아낙들은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러댔다.


피아노의 파가니니를 자처하는 리스트가 오늘날의 피아니스트들도 손사래를 치는 초절정 기교를 시전하면 말 그대로 그 자리에서 실신하는 여성들이 속출했다. 나폴레옹의 여동생은 파가니니만 나오면 까무라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런 비르투오소들의 등장은 반대로 철학자들의 예술관에도 영향을 끼쳤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예술을 ‘디오니소스’적인 예술과 ‘아폴론’적인 예술로 구분했다.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은 격정적인 예술을 말하는데 니체는 대표적인 디오니소스적인 예술로 음악을 들었다. 반면 아폴론적인 예술은 형식미를 중시하는 예술로 건축, 문학, 그리고 미술이 여기에 속한다.


과거의 유명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모두 현재까지 무조건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니체의 예술론 역시 시대의 제약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비극의 탄생은 형식과 조화를 강조하는 아폴론적인 예술의 대표적인 사례로 회화를 꼽고있지만 만약 니체가 붓을 자유로이 놀리는 것을 벗어나 아예 캔버스에 물감을 들이붇고 그 위에 알몸으로 대굴대굴 굴러대는 현대 미술을 접했다면 그림이야말로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의 정점이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이다. 바흐의 푸가 같은 바로크 음악은 전혀 디오니소스적이지 않고 오히려 형식미가 돋보이는 아폴론적인 예술이다. 하지만 니체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연주자가 나뭇가지로 바이올린 현을 긁어대면 실신한 아가씨들이 줄줄이 실려나가는 낭만주의 비르투오소들의 전성시대를 살았다. 따라서 이 대철학자는 격정적인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의 대표로 음악을 꼽았던 것이다.


이제 갑과 을이 바뀌었다. 음악은 한줌의 고용주 대신 스타로 군림하는 연주자와 작곡가가 갑인 세상으로 빠르게 변모했다. 더 이상 왕들의 소화를 돕거나 뱃놀이를 즐기기 위해 귓등으로 듣는 배경음악이 아니라 연주자의 손끝 움직임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듣는 연주자 중심의 음악이 된 것이다.


데카르트의 표현을 빌리면 ‘내가 연주한다, 고로 음악이 존재한다’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권력과 부를 함께 가진 왕과 교황이 뒷전으로 물러나고 대중이 예술의 주소비층으로 등장하자 개개인은 미약할 뿐인 청중이 갑이 아니라 화가가, 연주자가, 작곡가가 갑인 시대로 변모하게 되었다.


존재와 인식 사이에서 함께 길을 잃은 철학과 예술


준비가 없이 지도자가 된 사람은 간혹 남의 밑에서 일하던 때의 성과조차 보여주지 못하고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남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할 때는 흔들림없는 업무능력을 보여주었지만 자신이 판단하고 지시를 내려야하는 상황이 닥치자 뭘 어떻게 해야할지 감이 안오기 때문이다.


이런 지도자는 흔히 말하는 ‘이 산이 아닌가벼’를 반복하며 엄한 봉우리만 힘들게 오르내리기를 반복할 뿐이다. 그리고 고지를 정복하기 위해 지도자를 따르던 부하들은 이런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며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한다.


천년 넘는 세월 동안 교황과 왕이 지시하는 대로만 그리고 연주해오다가 갑자기 모든 것을 자신이 결정해야하는 상황을 맞은 예술이 바로 딱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자유가 예술혼을 사수하기 위한 자발적인 투쟁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라 외부의 변화에서 그냥 주어진 자유였기에 자유를 누릴 준비가 안된 예술가들은 스스로 이제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연주해야할지 머릿 속이 복잡해진 것이다.


현대예술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이 봉우리 저 봉우리 닥치는 대로 올라갔다가 ‘이 산도 아닌가벼’ 하며 내려오기 일쑤였고, 이런 예술의 모습을 본 대중들은 서서히 현대 예술에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예술의 중심을 잡아주던 철학사상도 기존의 형이상학적 존재론에서 탈피하여 인식론이 ‘존재’감을 보이면서 경험론이니 공리주의니, 실존주의니 하는 다양한 사조들이 발현하기 시작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 서양철학사의 새로운 시조를 자처하는 데리다 쯤에 오면 아예 기존의 형이상학을 발전적으로 해체하자는 움직임까지 나왔다.


절대왕정 이후 19세기까지의 예술이 진선미를 구분하는 칸트와 시대적 맥락을 함께 했다면 20세기 이후 현대의 음악과 미술은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2천년 가까이 이어온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부정하고 다원론을 주장하는 데리다의 해체주의와 사상적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데카르트부터 칸트를 거쳐 헤겔까지 이어지는 이런 인식론의 흐름을 에드문트 후설이 현상학이라는 명칭으로 정리했지만, 또 후설의 적자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 퐁티 쯤에 가면 역으로 인간의 지각에 기반한 인식론에 한계를 느끼고 다시금 존재론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퐁티는 아예 인식론의 선조인 테카르트를 부정하는 모습까지 보이며 인식의 중심을 의식이 아닌 ‘몸’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 사람의 (철학계에서만) 유명한 주장, ‘궁극적 실재는 표현이다’라는 말은 아직도 존재와 표상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현대 철학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제 과거처럼 한 시대를 풍미하는 지배적 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이론적 배경을 강화하기 위해 발전되었던 선과 악의 이원론에서 해방된 철학은 이처럼 각자의 취향에 따라 일원론으로 회귀하기도, 또 다원론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예술사조의 이론적 뼈대가 되는 사상의 흐름이 이렇게 다양해지자 예술가들의 운신의 폭이 넓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대상의 존재를 표상하는 고전적인 예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인식론적인 입장에서 내가 느끼는 대로 표현하겠다는 표현주의가 대세가 된 것 같았지만, 바로 이에 반발한 막스 베크만이 나타나서 다시금 존재론적 입장으로 돌아간 신즉물주의 (Neue Sachlichkeit)를 선보이기도 하였다.


한 때 한물 간 듯 보였던 존재론에 기반해 각자 미술과 철학의 세계를 구축한 막스 베크만과 메를로 퐁티가 동시대를 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인식론의 한계를 느낀 사상적 흐름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미술에서의 신즉물주의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마크 베크만은 그 뛰어난 손재주로 동년배인 에곤 쉴레와 함께 표현주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철학자들이 인식론과 존재론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기 시작하자 이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예술가들도 여전히 표현이냐 존재냐로 갈라진 것이다.



<표현주의 자화상>


Self Portrait Nude, Egon Schiele 1910


<신즉물주의 자화상>

Self Portrait with Champagne Glass, Max Beckmann 1919


표현주의의 등장과 이에 반발한 신즉물주의의 대두. 우리는 미술사에서 이런 모습을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다.


존재론적 예술에서 탈피한 인상주의가 초반의 질시를 이겨내고 대세로 자리잡자 이 후의 화가들은 인상주의가 예술의 전부인줄 알고 그림을 그려왔다.


그런데 이 19세기 MZ세대 화가들이 우연한 경로로 르네상스 미술을 접하게 되자 이들은 역설적이게도 르네상스 거장들의 꼼꼼한 화풍에 경탄하여 ‘그래, 이런게 진정한 예술이지’라는 탄식을 남기고는 선배들이 애써 벗어났던 형이상학적 이원론에 기반한 화풍으로 돌아가버리기도 했던 것이다.


To be continued...(다음이 마지막 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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