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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서방 Jan 20. 2024

[군생활 잘하기] 성장의 기록(7)

경력자의 장점과 전역의 결심 포인트

[경력자의 장점]을 배우는 과정

여섯 번째 보직 / 함정 보급관


"신입은 대체 경력을
어디서 쌓으란 말인가?"



경력자를 우대하는 각종 채용공고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유병재 씨가 SNL에서 희화했던 사회 풍자가 생각난다. 경력자가 뭐길래 어떤 조직에나 그렇게 경력자, 경력자 하며 찾는 걸까?


  공교롭게도 팔자에도 없던 두 번째 함정 보급관을 하게 됐다. 처음으로 같은 직무를 두 번째 해보는 경험은 뭔가 복잡한 심정이 들게 했다. 소위 시절이 문득 생각나면서 고생스러웠던 그 시절의 트라우마가 떠오르는 듯했다. 앞선 시리즈에서 언급했던 최악의 부장 2명을 모셨던 터라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편으로 마음은 가벼웠다. 호텔 경영자로 살아가던 무거운 책임감의 지휘관 자리를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업무 인수인계를 겨우 반나절 받았음에도 모든 일이 손에 익었다. 5년 전에 했던 업무인데도 어제까지 했던 것 마냥 모든 게 순조로웠고, 하나하나 흡수할 때의 속도감은 나도 놀랄 정도였다.


AI 가상 이미지 - 해군 함정


  늘 정신없이 분단위 계획을 세워가며, 조바심을 느끼던 중/소위 보급관 시절과 달리 더 많은 업무도 잠깐의 고민 후에 단시간에 결정해 처내곤 했다. 일주일이 지나 비로소 내 업무뿐만 아니라 부서원들의 업무도 같이 정리해 줬고, 빈 시간이 곧 생겼다. 과거엔 무작정 몸을 움직여가며 깨지고 부서지며 업무에 적응하기 바빴다면, 이 때는 더 쉽고 효율적으로 업무 할 수 없을지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할 수 있었다.


"그리도 어렵고 고단하던 일이
왜 이렇게 쉬울까?
옛날엔 왜 이리 어려웠지?


  그리고 그 답에 가장 근접한 건 경력자이기 때문임을 쉽게 알게 됐다.


    사실. 이때가 시기적으로 군생활을 마무리하던 시절이라 7년을 돌아보기도 했으며, 과거의 수많은 잘못된 의사결정과 사람을 대할 때의 미숙했던 태도에 스스로를 많이 반성했다. 그리고 관례에 얽매이지 않고 태도와 업무 방식을 고쳐나갔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들어보려 한다.


    함정에 귀빈이나 장성급 인사가 방문할 때 준비할 의전 용품은 배에 늘 부족했는데(군함은 행사가 목적이 아니니 애초에 준비하지 않는 게 정상..), 그때마다 타 함정이나 육상 보좌관실을 방문하며 행사물품을 대여(구걸)하러 다녀야 했다. 운 좋으면 1-2시간, 없으면 택배로라도 타 함대에서 구해오는 비효율적인 일을 매년 새로운 보급관은 반복하고 있다. 첫 보직 때는 '원래 보급관은 다 그렇다'라며 인계받았고 모든 함정 보급관들이 당시 그러고 살았기에 이 비효율적인 수고스러움을  '시간 낭비'로 인식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함정 보급관이 됐을 때, 꼭 이렇게 일해야 하나 싶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군부대 의전용품을 구할 수 없다면, 똑같은 물건을 제작하기로 했다. 외주 일러스트에 맡겨 똑같은 상품을 디자인했고, 자체로 10년 치 수량만큼을 딱 제작했다. 앞으로 10년 동안 근무하게 될 여러 보급관의 고민을 줄여준 셈이다.


* 이후 이게 어디서 소문이 났는지 여러 함정에서 어디서 맞췄는지 물어왔다.


    이 외에도 비슷한 사례는 수없이 많았다. 함정 기념품 관리, 매점 물품 적재, 비품 교체를 위한 예산 확보부터, 식당 리모델링, 함장 교대식, 각종 행사, 예산 확보와 관리 등 그전엔 낯설어 늘 숨이 턱턱 막히는 듯한 내가 무지한 분야들이 이제는 '길이 뻔히 보이는 업무'로 인식해서 대충 방향을 넘겨짚어도 맞는 길이었다.


  내 시간을 아끼면서도 업무를 완수할 '새로운 방법'을 계속 생각해 봤고, 과거를 단순히 반복하기를 지양하려 했다. 늘 정신없이 적응하느라 바쁜 새로운 보직만 밟다가 처음으로 경력직이 되어보니 왜 신입보다 경력직을 원하는지 몸소 알 수 있었다.


* 그래서인지 1년 동안 부장님이 나의 업무에 "NO NO" 하신 적이 손에 꼽는다.



[전역을 결심한 이유]


  신입의 열정은 없어졌지만, 경력직의 귀찮음이 남았다. 귀찮으니 더 빠르게 그리고 융통성 있는 일처리가 가능하고, 창의적인 해결책과 능숙함으로 모든 업무는 더 높은 차원으로 시원시원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배우고 익히기보다 갖고 있는 능력을 발휘해 내는 보직이었고, 그래서인지 매번 주어진 미션을 완수했다는 보고에는 부장님의 칭찬과 인정이 따라왔다. 누군가 나에게 "보급관 이거 어떻게 해? 이거 해야 해!"라고 막연히 질문하면, 나는 그 구체적 해답을 제시했다.


  그러나, 성장과 배움이 멈추며 찾아온 지루함은 내게 또 다른 위기였다. 그동안 늘 감당하지 못할 업무와 어려움 속에서 방황했는데, 익숙하고 쉬운 업무는 아무런 자극도 주지 못했다. 위기라는 도파민에 중독된 건 아니지만, 빠르게 변하는 사회 속에 홀로 정체되어 있다는 데에서 참을 수 없었다. 두 번째 함정보급관으로서의 1년은 그렇게 온몸이 가려운 것만 같은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이 찾아왔다. 아까운 시간을 어떻게든 만회하려 했으나 배움이 없는 군생활은 내게 참 의미 없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동안의 성장에 제동이 걸린듯했고 한 가지 질문이 계속 떠올랐다.


군이 지금껏 날 키운 것처럼
군은 앞으로 날 성장 시킬까?


배움이 없는 삶에 성장을 발목 잡힌 순간이었다.


처음엔 파병도 고민하고, 위탁교육이나, 국방어학원도 찾아보며 망설였지만, 모두 큰 의미 없을 것 같았다. 두 번째 함정 보급관으로 근무하며 1년 동안의 고민 끝에 더 높은 도약을 위해 군을 떠나길 결심한다. 성장하기 위해 군에 들어왔고, 더 성장하기 위해 밖으로 군을 나가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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