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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군 Jan 04. 2024

증발 2

그가 사라졌다

  다음 날 아내는 출근하지 않는 경환을 깨웠다. 경환은 이불 안에서 나오지 않고 하루 월차를 냈다고 거짓말했다. 출근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에 거실로 나와 휴대전화를 봤지만, 회사에서 온 연락은 없었다. 경환은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하고 밖으로 나가 동네를 산책했다. 평일 오전 동네는 평온해 보였다. 벤츠에 앉아 커피 한잔을 마셨다. 이 여유로움 속에서 딱 하나의 걱정이 주머니 속에서 만져졌다. 경환은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보고 햇살 속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20분 동안 앉아 있으며, 두세 번 휴대전화를 봤지만 카톡이나 부재중 전화는 없었다. 

  '하긴 목요일은 좀 바쁜 날이긴 하지.' 

  경환은 바빠서 한동안 돌보지 못한 텃밭으로 향했다. 시에서 주민들을 위해 저렴하게 분양한 곳이었다. 아이들에게 자연을 경험하게 해 주고 싶어 시작했지만 그 혼자 찾는 곳이 되었다. 밭을 갈고 이랑을 매며 좋아하던 아이들은 날씨가 더워지고 벌레들이 출몰하자 더는 이곳을 찾지 않았다.

  강을 등지고 있어서 텃밭 경치는 좋았다. 남한강 물줄기와 그 뒤로 작은 능선들이 쭉 펼쳐져 있어 보기만 해도 스트레스가 풀렸다. 경환은 공용 공간에서 삽과 물뿌리개를 들고 자신의 밭으로 갔다. 1.5미터 크기라

처음에는 작다고 느꼈지만 생각보다 다양한 작물들을 심을 수 있었다. 욕심을 내서 방울토마토와 고추, 가지, 오이 등 여러 농작물을 심었다.

 경환은 한눈에 자기 밭을 알아봤다. 다른 밭과 달리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방울토마토는 곁순을 치지 않아 수많은 가지가 정글처럼 엉켜져 있었다. 뽑지 않은 잡초는 작물들 사이에서 무릎까지 올라왔다. 고추는 황토색으로 말라 잎들이 비틀어 가고 있었고, 가지는 팔뚝 크기로 땅에 툭 떨어져 썩고 있었다. 그 옆에 오이 줄기들은 야금야금 땅을 기어가 다른 밭의 작물 줄기를 타고 올라 목을 죄고 있었다. 그야말로 작은 정글과 같았다.

  텃밭을 시작할 때 만해도 상추와 깻잎을 수확해 가족들과 식탁에서 고기를 싸 먹고, 맛있는 토마토를 먹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상상했었다. 하지만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는 그 쉬워 보이는 것을 경환은 못하고 있었다. 정리 안 된 밭을 보며 경환은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멍하게 서 있었다. 왠지 모르게 등이 따가워 돌아보니 한 여자가 그의 밭을 보고 있었다. 펑퍼짐한 바지와 긴 셔츠를 입고 머리카락이 하얀 할머니였다.

  "이게 뭐여?"

   경환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네라고 답했다. 

  "밭이여, 잡초여."

  할머니가 말하자 경환은 죄송하다고 말했다. 뭐가 죄송한지 모르지만, 경환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남의 밭에서 열매를 따다 들킨 것처럼 그의 목소리는 작았다. 

  "토마토 줄기가 난리네. 이게 곁순을 자르고, 고추하고 가지도 잘라줘야 하는데 그냥 놔뒀구먼."

  "바빠서 관리가 못 했더니. 중간에 잘라줘야 하는군요!"

  멋쩍은 듯 머리를 만지며 경환이 말하자 할머니는 말릴 사이도 없이 그의 밭으로 들어갔다.

  "작물을 그냥 놔두면 안 돼야. 필요 없는 것을 바로 안 자르면 본가지가 없어져"

   할머니는 잡초 가득한 밭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경환이 말릴 틈도 없이 방울토마토 가지를 손으로 꺾어 버렸다. 

  "틈을 보이면 안 돼야. 그냥 잡초가 다 자라. 총각."

  경환은 총각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줄기를 저렇게 자르면 작물이 죽을 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할머니를 지켜봤다. 그녀는 자른 줄기 중 큰 가지 하나를 들었다. 꽃들이 피어 열매를 볼 수 있는 줄기였다. 무례해 보이는 그녀에게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어머니 연배로 보이는 할머니에게 뭐라고 하기에도 어려웠다. 경환은 고개를 숙이고 풀을 뽑았다. 어서 그녀가 사라지기를 바라며.

 "이게 아까우면 이 가지를 여기다 그냥 심으면 돼."

 할머니는 어떻게 경환의 마음을 알았는지, 큰 줄기 하나를 땅에 꽂았다. 경환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더위를 먹고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남의 밭에서 이럴 수 있을까!'

  그의 눈초리가 올라갔다.  

 "다 알아서 잘 자라니까, 물만 잘 줘. 해가 뜨거워서 그냥 둬도 돼."

 이게 무슨 짓이냐. 아니 정말 방울토마토 줄기를 땅에 심으면 자라는지 경환은 묻고 싶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그녀에게 따지려고 일어서려는 순간 할머니는 손 볼 게 너무 많다고 푸념하며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무심히 밭을 떠났다.

  경환은 멀어지는 할머니는 보며 줄기 치는 시늉을 하다 그녀가 보이질 않자, 밭을 나와 버렸다. 잡초고 뭐고 간에 뽑을 게 너무 많아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할머니 때문에 더 일할 맛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밭일하기엔 날씨가 너무 더웠다. 밭 가운데 꽂힌 방울토마토 줄기가 경환에 눈에 들어왔다.

  '과연 살 수 있을까?'

  뿌리 없는 줄기가 땅에 꽂혀서 산다는 것을 경환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작물은 뿌리에서 영양분을 얻고 잎에서 광합성 작용을 해서 자라난다. 그게 자연의 이치다. 본래 줄기에서 잘린 가지가, 아니 떨어진 생명체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무리에서 다 큰 동물은 혼자 자립해서 살 수 있지만 식물도 가능할까! 

  5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할머니가 꽂은 방울토마토 줄기의 잎들은 축 처져 보였다. 경환은 줄기를 흙으로 꼭꼭 눌러서 덥고, 물을 잔뜩 부었다. 강에서 부는 바람에 잎들이 살랑거렸다. 그래도 축 처진 잎은 다시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작물을 만졌던 경환의 손톱 끝에는 초록색 물이 들어있었다. 손가락 사이의 패인 주름들이 더 깊어 보였다. 손을 펴자, 방울토마토 냄새가 올라왔다. 


  더위를 피해 들어간 근처 커피숍까지 방울토마토 냄새가 따라오는 것 같았다. 경환은 간단히 점심을 먹고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휴대전화는 조용했다. 가끔 문자가 왔지만, 은행 대출 관련 내용이었고 알 수 없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한참을 뜸 들이다 받아보면 통신사와 보험 관련 전화였다. 어디서 내 전화번호를 알았냐고 성질을 내고 끊었지만, 짜증이 쉽게 사라지진 않았다. 

  사람이 출근 안 해도 연락 안 하는 냉혈 인간들이라고 경환은 생각했다. 그는 저녁에 가족과 외식 후 집에 돌아와 씻고 자리에 누웠지만 쉽게 잠을 잘 수 없었다. 내일 출근해서 뭐라고 할까에 대한 고민과 이런 대우를 받고 회사에 다니는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변주임과 앞자리 박 과장까지 연락이 없자, 속이 뒤집혔다. 거의 20년 가까이 몸 바쳐 일한 곳이었다.

  "이 인간들이 사람이야?"

  "에. 뭐라고?"

  같이 TV를 보던 아내가 경환의 혼잣말에 깜짝 놀랐다. TV 채널을 돌리던 경환은 리모컨을 던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휴대전화 전원을 꺼버렸다.     


  다음 날 경환은 보통 때처럼 차를 타고 출근했다. 자율 출근제라 출근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지만 과장 이상직급은 암묵적으로 9시까지 출근했다. 고가도로를 넘자 긴 출근길 행렬이 이어졌다. 우회전하기 위해 깜빡이를 켜고, 통근버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회사 안 주차장 구석에 주차했다.

  경환은 건물에 들어가 자연스럽게 게이트에 사원증을 찍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각자의 휴대폰을 보면서 무표정한 사람들 사이에 서서 주변을 돌아봤다. 팀원들은 보이질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선 사무실은 여느 때처럼 조용했다. 가라앉은 공기 속에서 파티션 위로 사람들이 머리만 보였다. 경환의 발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경환은 자리에 가서 말없이 앉았다. 팀원들 누구도 먼저 인사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무실에 키보드 소리만 요란하던 때 팀장이 경환을 불렀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경환은 최대한 무표정한 얼굴로 일어섰다. 

  "정 과장님, 아니 정 프로 혹시 어제……."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하는 팀장을 보며 경환은 모았던 손을 풀었다. 경환의 깨문 입술이 열리는 순간 팀장이 경환을 쳐다봤다.

  "어제 그 업체 갔다 왔어요? 납품 어떻게 되는 거죠?"

  "네?"

  "납품 말이야. 납품 확인요. 나이스하게 됐냐고요?"

  "네 아니 어제 제가……."

  그때 임원실에서 문이 열리고 상무가 두 손가락을 입에 대며 담배 표시를 하자, 팀장은 급하게 수첩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자리에 돌아온 경환은 변 주임에게 카톡을 보냈다. 변 주임의 답변은 빨랐다.

  넵!

  아니 어제 뭔 일 있었어?

  전 어제 휴가라 모르겠는데요. 무슨 일 있었나요?

  휴대전화를 책상에 툭 놓은 경환은 고개를 들어 파티션 너머 팀원들에게 눈을 돌렸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무엇인가 치고 있었다. 경환도 그들을 따라서 다시 고개를 숙이고 모니터에 무엇인가 치기 시작했다.

               

            

 경환은 몇 년 뒤에 우연히 이 대리를 다시 만났다. 소심한 반항을 한 후 그는 다니던 회사를 나와 선배가 있는 작은 중소기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농산물로 과자를 만드는 회사였다. 차장이란 직함을 달았지만 회사가 큰길을 벗어나 한참 동안 시골길을 달려야 나오는 3층짜리 건물이라 예전 회사에 다닐 때처럼 폼이 나진 않았다. 회사도 작아 경환은 영업과 마케팅 업무를 같이 맡았다. 영업은 그런대로 경험을 바탕으로 했지만, 마케팅 업무는 생소해 후배 직원들에게 대부분 맡겼다. 

  "나이스한 박 대리가 MZ세대 맞는 느낌적 느낌으로 해주면 좋겠어요"

  이런 모호한 말로 업무 지시하는 경환을 후배들은 그런대로 좋게 봐줬다. 능력은 없어 보이지만 딴지를 걸지 않고, 빨리 피드백을 주는 상사라 견딜만하다고 생각했다. 회사가 국내뿐 아니라 해외로 영업을 확장해 나가면서 경환은 첫 출장을 사장과 함께 독일로 가게 되었다. 회사의 새로운 도전에 사람들의 기대가 컸다. (영화에서 나오는 뻔한 만남처럼) 공항에서 경환은 이 대리를 우연히 만났다. 만났다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독일에서 그녀를 봤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비행가를 갈아타기 위해 내렸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비행기가 연착되면서, 경환은 비행기에서 내려 정신없이 뛰어나갔다. 비즈니스석에서 내린 사장은 먼저 사라진 뒤였다. 사장과 동행이라 더 애가 탄 경환은 있는 힘껏 달리고 싶었지만 비행기에서 공짜라는 말에 잔뜩 먹은 와인과 맥주에 취기가 올라 빨리 달릴 수가 없었다. 오바이트가 쏠려 국내선으로 갈아타기 위한 길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오른쪽 국제선 대기 줄에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혹시 하는 마음에 풀린 눈을 다시 떠 한 곳을 응시했다. 그녀는 이 대리였다. 눈도 나쁘고 눈썰미도 없는 경환이 그때 어떻게 그녀를 발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긴 머리를 잘라 짧은 머리에 야상을 입고, 통 넓은 바지에 큰 배낭을 메고 있었다. 멀리 있었지만 웃는 모습이 틀림없는 이 대리였다. 오랜 시간 여행을 한 것처럼 보이는 그녀는 일행으로 보이는 외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를 다시 한번 더 만나고 싶었는데, 지금 이 순간 독일에서 그녀를 보게 되었다. 이 대리가 사라진 후 사람들은 그녀의 SNS을 뒤졌는데, 그녀 위치가 인도의 한 도시에 찍혀있거나, 이름을 자넷으로 바꾼 후 동유럽을 여행하는 것 같다고도 했다. 외국인 사이에서 밝게 웃는 이 대리의 모습이 낯설었지만 왠지 어색해 보이진 않았다. 그녀가 무리를 나와 혼자 세상을 다니며 어떻게 이곳에 서 있는지 궁금했다. 경환은 아는 척을 하기 위해 그녀 쪽으로 발길을 돌리며 시계를 봤다. 3시 46분. 4시로 적혀 있는 비행기 표를 보며 경환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장이 사라진 길과 그녀가 서 있는 길을 번갈아 보며 경환은 코트와 가방을 손에 꼭 쥐고 주황색 카펫이 깔린 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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