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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온 Sep 12. 2023

페르소나

집에서도 가면을 쓸 것인가

나는 남에게 감정을 잘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다


조금 더 확대해서 말하면 감정을 누르거나 표정을 딱히 숨기는 걸 잘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오랫동안 노력해 왔었는데 덕분인지 화도 잘 나지 않고 등가교환처럼 기쁨도 적당한 선에서 즐기는 것이 습관처럼 돼버렸다.


일일이 물어보고 다니진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나를 대체로 친절한 사람, 적당한 선까지만 들어왔다 나가는 사람, 귀찮아질 것 같으면 사라져 버리는 사람 정도로 알고 있는 듯하다.


오랜 친구들은 나를 머리가 좋고 냉정한 사람, 하지만 정이 많고 의리가 있는 친구, 자유로워 보이지만 고지식하고 그릇된 행동은 하지 않는 사람으로 길지 않았던 평생 동안 나를 믿어줬다.


아내는 나를 또 다르게 기억하는 듯하다. 흔히 부부들이 서로에게 그러듯 내게 오랫동안 상처가 되는 말들을 많이 해왔었는데 그 모진 말들 속에서 그나마 칭찬 비슷한 걸 끄집어내자면 성실한 사람 정도일까.


같이 살다 보니 서로 미성숙한 면들을 여지없이 보일 때가 많았는데 처음에는 그렇게나 잘 맞아서 결혼했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다른 면만을 내보이며 자신을 분리해 내려 애쓰는 걸 보면 부부생활이 참 쉬운 듯 어려운 듯하다.


바깥에서의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100%를 일일이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자신이 가진 가면들 중 가장 효율이 좋은 몇 가지만 쓰고 최대한 매끄럽게 넘어가는 느낌이었기에 부부생활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감정의 변화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공유하고자 했던 노력은 오히려 독이 되었던 것 같다.


서로 자신의 감정을 먼저 토해내기 바빴고 상대가 받아들일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서로에게 실망하고 불신을 쌓아갔었다고 회상한다.


이런 감정 소모는 결국 집에서 써야 하는 어떤 가면을 만들어내고 가면 아래 서로를 숨긴 채 그저 하루가 조용하면 그걸로 그뿐인 하루에 만족하며 같은 공간 속 다른 시간을 살아갔던 것 같다.


그 결혼생활 끝에 붙은 이름이 성격차이 이혼이었을까.


사람들은 종종 얘기한다. 부부사이에도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이 맞나. 반드시 그래야 하나. 아니.


모범적이거나 이상적인 부부들의 삶을 보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상대방이 불편해하거나 불쾌해할 행동, 말투를 조심히 가려서 한다. 서로를 위하며 결정을 내릴 때 혼자만의 결정이 아닌 모두를 고려한 결정으로 서로 천천히 상의하며 정한다.


사람들은 흔히 착각한다. 위에 나온 것들과 같은 부분들을 지키면 좋은 부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이는 우리가 어릴 때부터 잘못 배워온 상식들과 같은 맥락을 걷고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매일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하고 수업시간에 필기를 하며 집중하는 일을 반복하면 서울대에 갈 수 있다고 한다. 턱을 얇게 갈아내면 미인이 될 수 있다고 하고 옷을 잘 입으면 이성으로부터 인기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성격이 나쁜 사람을 걸러내면 좋은 사람들만 만날 수 있다고 말하며 매일 운동하는 습관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소득이 높은 사람들 중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이 많은 건 사실이다. 실제로 바쁘고 예민하며 성취욕이 높고 아침부터 시작하는 루틴이 많기 때문이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 중 공부시간이 긴 학생들이 많다. 누군가에겐 게임이 긴 시간을 들이는 취미이듯 공부가 그들에겐 그렇고 오랜 시간을 집중하면 당연히 그 분야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이런 식으로 어느 결과에는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과정들이 있다. 하지만 그 과정들만을 모은다고 해서 그 결과로 이어지는가. 확률의 문제다.


나는 내 결혼 생활 중 어느 단면만을 얘기해 왔지만 결혼 후로도 몇 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사회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을 마주해 갔고 그를 통해 인간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아내를 대하는 태도의 수준은 그에 따라 성장해 갔다.


집에 오래 있는 당신이 설거지는 좀 해주면 안 되냐고 짜증을 내던 내가 언젠가부터는 가족들이 아직 잠든 이른 아침에 혼자 조용히 설거지를 끝내고 전날 밤 아이가 어질러놓은 장난감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저 씻고 빨리 나가는데만 급급하던 내가 조금 더 일찍 샤워를 시작하고 내 머리카락을 닦아낸 후 화장실을 나섰다. 내가 바쁜 시기에는 끼니를 잘 챙기지 못하는 아내가 편히 먹으라고 즉석밥과 설렁탕 팩을 따로 사뒀다.


주변이 편해야 나 역시 편해지고 그러려면 내가 힘을 크게 들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는 걸 어느 순간 자연히 알게 되는 계기들이 종종 있었다. 내 행동들은 어떤 매뉴얼이 아니라 내 주변이 나로 인해 비롯되고 이를 내가 조금씩 바꿀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하며 자연히 흘러나온 결실들이었다.


다만 조금 늦게 맺기 시작했었다는 것이 지금도 서글플 뿐.


부부 사이에 지켜야 할 것들이 있을까.


우리는 항상 매뉴얼을 필요로 한다. 막연한 출구를 찾아 헤매는 것보다 가이드라인을 따라가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상대방 말에 귀 기울이고 그때그때 반응을 하는 것보다 잠시 가면을 보여주고 지나치는 편이 덜 소모적으로 느껴진다.


만약 하나의 방법이 있다고 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포기하지 않는 것 정도일 것 같다. 비록 지금은 부족할지 모르나 내가 상대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믿음, 더 좋은 부모가 되어가고 있다는 믿음 등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


서로에 대한 선은 같이 지내다 보면 알게 된다. 정 모르겠다면 다른 번지수를 찾을 필요도 없이 상대에게 진심으로 물어보면 된다. 단순히 어떤 상황을 모면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바뀌길 진심으로 원하고 있다면 상대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슬프지만 상대가 내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할 때도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나 자신도 내 맘 같지 않은 것처럼 상대도 똑같다. 만약 마음이 맞았다면 그에 감사할 뿐.


많이 늦어버린 요즘도 종종 옛 생각이 떠올라 후회를 할 때가 있다.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가면을 쓰고 있던 그 순간에 내 힘으로 조금 더 들어주고 같이 웃어줄걸, 남에게 먼저 내 고충을 말할 용기가 없다면 잠시나마 먼저 들어주는 용기라도 내볼걸, 먼저 물어볼걸, 남에게 묻고 다니지 말고 내가 충분히 고민하고 상대와 상의할 걸, 조금이라도 일찍 그런 사람이 돼보려고 노력해 볼걸, 그랬다면 나는 아내에게 조금은 더 좋은 사람이지 않았을까.


비록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자. 과거는 바꿀 수 없겠지만 지금의 나는 언제라도 바꿀 수 있으니까. 사람들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을 조롱할지 모르지만 비어버린 외양간이니 고치기도 쉽겠지. 뭘 고쳐야 할지 뼈저리게 알았으니.


부부사이에 지켜야 할 것들 이전에 사람으로서 해야 할 성장을 해나갈 뿐이다. 나머지는 그 이후에 자연히 정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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