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죽어야만 할 이유가 있을까

살아야만 할 이유는 모르겠는데, 죽어야만 할 이유는 없어요

by 김해랑


'살아야만 할 이유가 있을까'라는 글로 이번 브런치북 연재를 시작했다. 나는 그 답을 찾지 못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드라마틱하게 완치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살 맛이 좀 난다. 죽어야만 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내가, 죽고 싶을 만큼 아프던 상처들을 소화할 힘이 있는 사람인 것 같아서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원한다. 그러나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나 내가 원하는 방식과 원하는 정도의 사랑을 주는 기적도 일어나기 쉽지 않은 법이며,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도 누군가에겐 너무 어려운 숙제다. 나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지 못한다. 조금은 사랑할지 모르지만, 실은 사랑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입으로 내뱉어 인정하기까지는 하지 못한다. 그만큼 내게 자존감 따위의 단어는 어색하다. 이십 몇 년간 성장하면서 습관화된 나쁜 습관이 몇 편의 에세이로 교정되었다면, 지구에는 불가능한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나와 비슷한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있더라도, 내 삶을 소중히 여기세요, 스스로를 사랑하세요 같은 이야기는 하지 못하겠다. 나와 같이 무기력을 병증 수준으로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그 무엇을 권하는 것도 벅차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걸 잘 알기에 이걸 해 보세요, 세상엔 즐거운 게 많답니다, 같은 이야기도 하지 못하겠다.


그런데 내가 '그럼에도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이유는, 내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분명 이번 여름을 무지막지하게 싫어했다. 이번 여름에도 덥고 습한 날씨가 내 예민함을 부추기는 것 같아 짜증이 머리끝까지 났다. 안 그래도 사는 게 버거운데 한여름을 버티는 건 더 버겁더라. 어느 날 눈을 떴더니 내 병과 함께 여름이란 계절이 없어졌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걸 거의 다 잊어버리고는, 여름이라는 단어가 다시 예뻐 보이는 지경이다. 수박을 먹고 그늘을 즐기던 게 그립다. 게다가 내가 스스로를 '버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다음 여름은 버틸 만할 것 같다. 적어도 다음 여름까지는 살아 있고 싶다.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는 완치 여부나 시기를 확신하지 못한다. 팔에 금이 가면 몇 주 동안 깁스를 한다는 식으로 정해져 있겠지만 뇌 속 호르몬 체계는 뼈나 살과 달라서 한번 고장나면 지가 맘에 들 때 돌아오나 보다. 달고 살 수밖에 없는 내 병증처럼, 있을 수밖에 없는 여름이라면 그냥 요령껏 지내 보겠다는 거다. 너무 더우면 방에 숨어 버티고. 적덩히 더우면 하늘은 맑을 테니 그늘막에서 풍경 구경도 하고. 어딘가로 가는 길이 더우면 아이스크림이나 음료를 하나 사 들고, 집에 오는 길이 더우면 마트에서 세일하는 수박을 한 덩이 들고 오고. 나름의 방식대로 이겨내다 보면 그 순간이, 더위를 피하는 바로 그 순간이 즐거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그러다 날 좋은 가을이 오면 한동안 편하게 지내고, 추운 겨울이 오면 붕어빵과 핫초코, 귤과 전기장판으로 견디고 말이다. 나는 그 모든 계절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인 것 같다. 몇 편 안 되는 글에 담긴 몇 장면 안 되는 아픔들이지만, 그럭저럭 소화해냈으니 말이다.


여기서 기억의 소화란, 내 나름대로 정의하면 '발목을 무겁게 붙잡던 그 시절의 감정을 종이비행기처럼 잘 접어 날려보내는 것'이다. 앞으로도 곱게 접어 날려보내야 할 감정들이 많다. 어느 감정은 날아가는 듯하면서도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와 내 이마를 때리기도 하고, 어느 감정은 날려보내기는 커녕 잘 접는 것조차 힘들 거다. 그럼에도 아픈 기억과 그것이 지금까지 미치는 감정의 여파를 글로 적고, 아주 사소한 처방을 스스로 내리고, 작은 숙제를 - 예를 들면 3분 카레에 계란후라이 직접 해서 얹어 먹기 같은 것 말이다 - 해내는 일련의 과정에서 나는 다 병들어 쓰러진 줄 알았던 내 마음이 아직 잘 견뎌주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 정도라면 나는, 다음 여름도 어찌저찌 버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가을을 맞겠지.


브런치에 차마 적지 못한 기억과 감정도 꽤 있다. 사실 그것들이 나의 잠을 앗아가고, 때로는 잠을 쏟아지게 하고, 정말 심할 경우에는 삶이라는 걸 끝내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했던지라 풀어내야 하는 '최종보스'는 아직 손도 대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제는, 적어도 죽고 싶지는 않다. 죽어야만 이 고통이 끝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야금야금 되새김질하고 소화시키다 보면 안 죽고도 내가 그 놈들을 잘 구워삶을 수 있을 것 같다.


안타깝게도 이놈의 세상이 한 번도 상처받지 않고 살 수는 없는 세상이라면, 나는 앞으로도 나의 아픔과 불안과 우울과 그 모든 것들을 푹 삶고 꼭꼭 씹어 먹어 보겠다. 소화와 배출이 잘 되도록 말이다.


다들 행복하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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