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처방: 3분 카레에 계란후라이라도 직접 해서 얹읍시다
- 오늘도 배달 음식을 드셨군요.
네, 맞아요. 배민 VIP일 거예요. 확인은 안 해봤지만. 돈 아껴야 하는데. 그래도 배달 안 시킬 때는 쿠팡에서 잔뜩 사둔 냉동 볶음밥 싼 거 먹으니까 아마 괜찮을.. 거예요.
- 돈 문제가 아니라 건강 문제가 중요할 것 같은데요... 음식을 해 볼 생각은 없으세요?
그, 사실 핑계긴 한데요, 집밥을 만들어 줄 사람이 없는 게 너무 슬퍼요.
- 혼자 사니까 당연한 거 아니에요? 자취생이잖아요. 스스로 챙겨 드셔야죠.
아니, 맨날은 말고요. 친구들은 아플 때나 시간 날 때 가끔이라도 본가에 가서 부모님이랑 집밥 먹는 것 같더란 말이에요. 근데 오늘따라 좀 냉정하게 말하시네요.
- 방이 더러워서 한 소리 하고 싶었어요.
내일 치울게요. 오늘은 브런치 공모전 마감 날이어서 진짜 정신이 없어요.
- 아, 그러네요. 음, 챙김받는 게 필요할 때 그렇지 못했던 경험들이 아픈 거군요.
네. 고등학교 때 이야기를 해 드렸듯이, 전 고등학교 때랑 대학교 때 기숙사 생활이랑 자취를 하면서... 본가를 안식처로 느낀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기숙사나 자취방에서는 내가 나를 챙겨야 하는 거고. 근데 언제부턴가 그게 너무 버겁고 싫더라고요. 내 자신을 챙기는 게.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안락함에서 추방당하는 것 같아요. 아주 가끔 안락함을 맛보고 다시 고군분투하고, 가끔 지치면 안락한 공간, 친구들에겐 그게 가족들이 있는 본가겠죠, 그런 곳에 가고 그러는 게 인생 같은데. 저는 그런, 최후의 보루 같은 공간이 없어요. 특히 저는, 우울증이 제게 온 뒤부터 저는 정말.. 너무나도 안락하지 못했어요. 우울증 약을 너무 오랜 기간 동안 증량하고 추가하며 이 병이 나에게서 참 떠나가질 않는구나 새삼스레 느꼈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단순당만 섭취하거나 폭식을 거듭한 탓에 건강한 식습관과는 너무 많이 멀어졌고, 몸이 물 먹은 솜 마냥 느껴지고 주먹에 힘이 잘 안 들어갈 때도 이게 꾀병인지 아닌지 구분을 못 하겠고, 운동이나 독서와 같은 건전한 스트레스 해소법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필요할 때 가장 실천하기 힘들더라고요. 당장 숨을 몰아쉬는 것도 짜증이 나는 우울증 환자에게 첫 걸음을 떼기 너무 힘든 것이어서요. 누가 나를 런닝머신 위에 직접 올려 놓거나 손에 책을 쥐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간단한 것을 스스로 해내지 못하고 축 늘어져 있는 내 스스로가 한심하고 비통했어요.
다리가 부러져서 못 걷는 건 게을러서 퍼질러 있는 거랑 확연히 구분이 되잖아요? 근데 이건 안 그래요. 외부로 드러난 상처가 아니니까. 게으름과 병증을, 그리고 지금 이 정도로 슬픈 원인이 진짜 객관적으로 그만큼 슬픈 일 때문인지 병 때문인지를 쉽게 구분하기가 어려워요. 이 병의 특징은 스스로에 대한 비난을 더 크게만 만드는 것 같아요. 저는 아직도 오늘의 내가 나태해서 늘어져 있는 것인지, 지금의 내가 진정으로 슬픈 것인지 구분하는 게 너무 어려워요. 그게 이 병의 무서운 점인 것 같아요.
- 안 그래도 무기력한 상태를 만들어내는 병인데, 그 상태가 항시 지속되는 병인데, 혼자서 자기를 챙겨온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벅찬 느낌이 겹겹이 쌓이긴 했겠네요. 혹시 본인이 스스로를 챙기고 나서 기분이 좋았던 경험은 없나요? 음식을 해서 먹은 거든, 옷을 사서 입은 거든.
아, 있어요. 교환학생을 갔을 때 음식을 꽤 자주 했어요. 한국에 있을 때보다 음식을 훨씬 많이 해 본 것 같아요. 거긴 배달도 어렵고, 외식 물가도 비쌌거든요. 바깥에서 사 먹는 음식이 제 입맛에 안 맞는 경우도 많았고요. 그래서 재료를 사서 직접 해 먹는 수밖에 없었어요. 샐러드용 야채믹스에 아시안 마트에서 산 고추장, 참기름으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기도 했죠. 기숙사 공용주방에 밥솥이 없어서 냄비밥을 해야 했는데, 처음엔 죽이 되거나 설익거나 했는데 차츰 하다 보니 달인이 된 거예요. 저 스스로 칭찬 거의 안 하는데 제가 먹어도 밥이 맛있더라니까요. 그 때도 실실 웃으면서 밥 먹었고. 아, 그 떄 생각하니까 웃기네요.
그리고 베이킹도 해 봤었어요. 푸딩, 타르트, 브라우니와 쿠키, 먹다 남은 단백질 쉐이크로 만든 카스테라까지. 평소 디저트를 좋아했지만 만들어 볼 엄두는 도저히 못 냈는데, 기숙사 공용 주방에 있던 오븐을 어느 날 뚫어져라 보다가 결심했죠. 저걸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한 번이라도 써먹어 보자.
동네 마트에 가니 베이킹 키트가 굉장히 많았어요. 내가 나를 잘 챙겨 먹이고, 맛있는 것을 골라 주고, 아, 거기 식료품 물가가 싸서 한국에서는 엄두를 못 내던 유기농 식재료를 야심차게 장바구니에 담기도 했는데, 뭐 그런 식으로 내가 내 입에 들어가는 것들을 고민한다는 게 참 생경하면서도 따뜻한 일이었던 것 같아요. 그 때 저는 한국계 심리상담사 분께 상담을 받고 있었는데, 선생님께 베이킹을 시작했고 나 스스로에게 무언가를 잘 해 주려는 감각이 새로웠다고 말씀드렸고, 선생님은 진심으로 기뻐해 주셨어요.
아침은 보통 그래놀라에 과일과 요거트를 곁들여 먹었고요. 음, 예를 들어 점심에 토스트에 에그샐러드를 얹어 먹으면, 저녁에는 항상 밥이 땡기더라고요. 불닭소스를 얹은 치킨마요덮밥을 엄청 좋아했어요. 불닭소스는 엄청 멀리 있는 마트에만 팔아서 아껴서 조금씩만 뿌려 먹었죠. 닭고기를 사 와 썰고, 익히고, 상추를 씻어 자르고, 에그스크램블을 하는 내내 곧 내 입에서 느껴질 맛을 기대하게 되는 게 저는.. 되게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서울에서 거의 사 먹거나 배달을 시켜 먹을 때는 음식에 대한 기대감이 별로 없거나 짧게 느껴졌는데, 직접 음식을 준비하니 준비 과정 내내 즐거움이 느껴졌거든요 나 스스로를 챙겨 먹인다는 느낌도 굉장히 좋았고요. 그동안 나 스스로를 내가 아껴준다는 감각을 느껴본 적이 잘 없어서.. 오, 이렇게 얘기하다 보니까 저 요리하고 싶어졌어요!
- 오, 그거 되게 반가운 말이네요. 근데 너무 어려운 것부터 하려다가 금방 포기하고 싶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지금 컨디션도 별로 안 좋으니 거창한 요리 말고 간단한 조리부터 하세요. 3분 카레에 계란후라이만 얹어 먹어도 괜찮을 거예요.
좋아요. 저 근데 갑자기 생각났는데, 제가 아빠에 대해 따뜻하게 기억하는 에피소드들 중 많은 부분도 '챙겨 주는' 거에 있었던 것 같아요. 어릴 때 아빠 일이 끝나고 가끔씩 한가득 들고 오던 과자봉지가 좋았고요. 천둥번개가 치던 날 혼자 집에서 강아지 인형을 안고 무서워했는데 아빠가 금방 집 도착한다고 전화해줘서 좋았고요. 제가 해리포터를 좋아하는 걸 알고 아빠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해리포터 영화가 담긴 dvd를 사 와서 재밌게 본 게 좋았어요. 어떤 일이 생겨도 내 편이라고 해 준 아빠 말도요. 우리 딸래미가 있어서 안 심심하다고 하는 아빠 말도. 생일 때 미역국이랑 케이크는 꼭 먹어야 한다고 하면서, 오늘은 치킨 많이 먹고 싶다고 케이크까진 별로 안 먹고 싶다는 내 말을 듣고도 매번 케이크를 사던 아빠가, 미역국을 끓이면서 미역을 참기름에 한번 살짝 볶으면 맛있다며 너 자취할 때 대비해서 꼭 기억하고 있으라는 말을 매년 똑같이 하던 아빠가 좋았고요. 대학 학점이 잘 나왔다고 알려줬는데 내가 그 날 본가에 없고 서울에 있으니까 혼자서라도 맛있는 거 시켜먹으라고, 좋은 일이 생긴 날은 혼자라도 기분 좋게 축하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안 그러고 살다 보면 혼자 지내다 문득문득 이유없이 서러워진다고, 그런 말들을 해주던 아빠가 너무 좋았어요.
챙김받는 거, 저에게 완전히 부재한 게 아니었네요. 물론 원할 때 받지 못한 적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없었던 건 아니었어요. 아빠도 많이 힘든 인생을 살아왔을 테니까. 그 와중에 날 챙겨준 거니까.
사랑받은 기억을 떠올리는 건 제게 안정감을 주는 것 같아요.
- 퐁구 안고 더 떠올려 보세요. 그러다 기운이 더 나면 음식을 해 먹는 것도 시도해 보시고요.
그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