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색채
무채색의 삶을 살던 이에게 염료를 선물한다면 그는 분명 화들짝 놀랄 것이다. 색감을 내는 것 외에 무해함을 아무리 설명해도 그는 귀를 막고 팔을 휘저으며 본인의 삶을 '그대로 두라'고 했을 것이다. 평생 감각해본 적 없던 채도를 낯설어하며. 그저 채도일 뿐인데. 그저 익숙하지 않을 뿐인데. 사랑이, 정이, 인연이, 추억이, 칭찬이, 뭐 그런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도망치고 싶은 대상일 수 있다. 무채색이 두려워하는 무언가일 게다.
하지만 놀라 도망간 그는 저 멀리서 고개를 빼끔 내밀고 색채를 염탐하고 있다.
누가 알겠는가. 아주 나중일지라도, 그는 무지개를 그리는 화가가 될 수도 있겠지.
- 감각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탑재한 이어폰을 구매했지만 귓가에 거니는 것은 아이들의 웃음소리였다. 그런데 그것은 내 선택이었다. 해당 기능을 끄고 '외부 소음'에 대한 자발적 포용을 마음먹은 것이다. 세상을 감각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내게 옳았다. 장소는 초록빛 서울숲, 시간은 햇빛 좋은 16시였다.
- 곁
어느 날 기타줄은 울림통에게 불평을 토로했다. 본인은 이렇게나 흔들림을 반복하는데 너는 팔자 좋게 가만히도 있다고. 너는 나와 같은 선율의 아픔을 공유하지 못하며, 악보를 걸어가는 내 발걸음은 네 공감의 대역을 벗어난 듯해 참 서운하다고. 울림통은 상처받은 표정으로 사라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날부터 기타줄은 공명(共鳴) 아닌 독명(獨鳴)을 시작했다. 납작하고 공허한 소리는 마음 둘 곳이 없었다. 멀리 떠난 울림통도 그 어떤 진동을 전달받지 못한 채, 아니, 받지 않은 채, 기타줄의 흔들림을 끌어안고 견뎌내던 본인을 이제는 그저 무감각의 웅크림 속에 파묻어두었다.
누군가의 곁을 지킨다는 것은 아름답고도 참 어려워서, 기타줄의 흔들림은 본인만이 오롯이 1차적 감내를 해야만 하는 것일지도 몰라서, 우리는 공명을 포기하거나 불신한다. 그럼에도 울림통이 기타줄의 울음소리를 듣고 같이 울어 주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그건 분명 인생의 공유였고 귀중한 공감이었다.
- 볕
볕들 날이 있겠지, 하는 말에 담긴 이면을 생각한다. 먹구름과 천둥과 번개와 비에 대한 부정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는 점을 발견한다. 회색빛에 대한 반감. 그럼에도 나는 그 찡그림을 집어 품 속에 곱게 담고 온기를 전하고 싶다. 살아가는 느낌이 아니라 버텨내는 느낌을 가득 머금은 잿빛 단어들에 쓰는 편지다. 나는 네가 온갖 것들을 끌어안고도 유유히 바람을 따라 걸음을 옮겨내고 있다는 것에 경의를 표한다는 마음이다. 그래서 나는, 볕이 들든 들지 않든 너의 날씨를 응원한다.
- 단어
삶의 개수대로 재정의되는 세상의 단어들은 그 자체로 찬란하고 그것만으론 공허해서 또다른 의미들과 엮여 하나의 문장이 되고 하나의 생각을 품고 하나의 마음을 담고 하나의 서술로 남고
각자의 단어들을 품에 안고 살아가는 인생들은 그 자체로 사랑스럽고 그것만으론 외로워서 또다른 인생들과 엮여 누구의 친구가 되고 누구의 가족이 되고 누구의 연인이 되고 누구의 동료가 되고
그렇게 너의 단어는 그저 홀로 남은 단일함이 되지 않고
- 미묘함
관하여와 대하여,
정렬과 배열,
웃음과 미소,
자국과 흔적,
애상과 애수.
단어들을 고민하는 순간들이 좋다. 누군가 내게 그런 정성을 보여주는 듯한 손편지도. 미묘한 단어들 간에 큰 차이가 있다고 느껴서가 아니다. 그 차이조차 시간을 들여 고민할 정도로 마음의 전달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 좋아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런 거다.
- 책
도서관 근로장학생으로 1년 넘게 일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 책을 분류하다 보면 사람의 손때가 많이 묻은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이 확연히 구분된다.
툭 건드리면 바스라질 것처럼 낡았으나 실은 어린 책들이 있다. 전공과목 교재나 출판 즉시 베스트셀러에 오른 유명 작가의 책들이 그렇다. 반짝거릴 듯이 새 것임을 뽐내지만 실은 오래된 책들도 있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그만큼 찾아주지 않았다는 뜻이니 꽤 서글플 테지만 당당하고 꼿꼿하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대출 횟수가 적다는 것은 그 책의 가치가 낮다는 게 아니라, 아직 그 책의 가치를 '알아봐준' 사람들이 적다는 뜻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두 종류의 책들은 다른 방식으로 정이 간다. 전자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의 묶음이 어떤 종류인지 그 시류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눈길이 간다. 후자의 경우에는 내가 그것의 존재를 발견한 순번에서 꽤 앞쪽을 차지했다는 것에 기뻐 눈길이 간다. 새로운 존재를 반갑게 맞이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우니 말이다.
- 의자
누군가의 무게를 기꺼이 지탱해주는 일은 버겁고도 숭고하다.
- 기쁨
존재가 기쁨이 된다는 것은 그 의미가 내 삶을 지탱한다는 것.
사람들의 꿈이 '세상의 기쁨'이라면 사회에 아픔은 없을 것.
나의 기쁨도, 누군가의 기쁨도 아닌 이유는
그것이 나만의 기쁨과 누군가만의 기쁨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
세상의 범주가 어디까지인지는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당신의 세상'에서 단단히 자리잡은 기쁨이 되기를.
- 게임
주변에 게임을 하는 사람이 꽤 있는데, 나는 할 줄 아는 게임이 거의 없다. 아주 어릴 때 했던 슈게임이나 과자 게임들이 전부다. 게임에 그닥 흥미를 느끼지 못한 이유는, 첫째는 승부욕이 별로 없고, 둘째는 몬스터나 적군을 죽이는 것에 그리 재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메이플스토리를 할 때 내 캐릭터보다 슬라임이 귀여워서, 슬라임을 열 마리 때려잡으라는 초기 미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귀여운 동물 키우기 같은 게임을 해 보면 재미를 붙일 수 있을지도.
- 슬리퍼
쉽게 신기지만 쉽게 벗겨진다. 그렇다면 슬리퍼 같은 인간관계는 선호하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맞지 않는 구두 같은 관계보다는 나을 수 있겠다. 오래 걸을수록 아픈 구두는 결국 벗겨내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보면 신고 있을 때 편안한 슬리퍼는 좋은 관계가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조금만 달리려고 하면 쉽게 벗겨지고 때로는 넘어지게끔 만드는 슬리퍼가 '지속성'의 측면에서는 그리 좋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생각을 달리 해 보면 슬리퍼 같은 관계도 꽤 괜찮을 수 있다. 굳이 달리려고 해서 문제인 거지. 슬리퍼의 본래 용도처럼 차분히 쉴 때나 편안히 걸을 때는 그 무엇보다 발을 쉬게 해 주는 신발이니 말이다. 신을 때도 뻑뻑하고 벗을 때도 힘든 구두에 비할 때, 슬리퍼는 쉽게 신기고 쉽게 벗겨진다. 앞 문단에서 '쉽게'는 '지나치게 쉽사리'라는 의미였다면, 이 문단에서 '쉽게'는 '수월히'의 의미다. 아프지 않게 신기고 아프지 않게 벗겨진다. 만날 때부터 헤어질 때까지 그런 관계가 있다면 환영할 만한 일이다. 아쉬움 없을 만큼 신는 동안이 행복했다는 이야기일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