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취미랄 것도, 삶의 재미랄 것도 없는

오늘의 처방: 일상 단어를 제목으로 애정 어린 조각글 써 보기

by 김해랑

- 마지막 대화인 것 같네요.


벌써요? 아직 못 한 얘기가 많은데, 제 얘길 들어주는 일이 귀찮아지셨나요.


- 저는 더 들어줄 수 있는데, 브런치 공모전 마감일이 오늘이라서요.


그러네요.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이건 오늘 반드시 해야겠어요.


- 오, 어떤 얘기죠?


세상 사는 재미가 없어요.


- 그 비슷한 말은 이미 많이 들은 것 같은데요...


아니, 다시 정확히 말하면 취미를 찾고 싶단 말이에요.


- 아하, 그런 거라면 좀 반가운 소리네요. 좋아하는 뭔가가 있나요?


글쎄요.


- 음, 좋아하는 음악? 좋아하는 영화? 진짜 없나요?


음... 저는 세상의 모든 요소에 무관심했는지도 몰라요. 유튜브 알고리즘이 거의 모든 걸 해결해 주죠. 음악을 듣고 싶을 때도, 심심함을 물리쳐 줄 영상이 필요할 때도. 취미를 갖고는 싶은데 뭐 하나를 꼽지는 못하겠어요. 뭔가 취미라고 해도 그 분야에 대해 진짜 잘 알 정도로 파고들어야 될 것 같고, 악기나 운동 같은 걸 취미로 하려면 잘 해야 할 것 같고. 그래야 어디 가서 뭐가 취미입니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부담감이 들어요.


- 좋아하는 게 취미죠. 잘 하는 건 특기고.


그렇긴 하죠.


- 그럼 어떤 취미를 시작한 지 3개월까지는 일부러 못 해야 한다고 제약을 걸어 두는 건 어때요? 예를 들면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고 칩시다. 무조건 3달 동안은 지지리도 못 그려야 해요. 퐁구를 그린다? 퐁구 실물 사진처럼 그리는 게 아니라 진짜 하찮은 버전의 퐁구를 그리는 거예요.


엥? 그럼 재미가 있을까요?


- 못 해도 재밌어야 취미로 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더군다나 취미에까지 부담감을 가지는 00씨 같은 경우에는요.


오. 그럴 것도 같네요. 근데 3개월이라는 제약은 왜 두나요?


- 잘 하고 싶어질 수도 있잖아요. 처음부터 막, 잘 해야 한다! 라는 부담감 말고, 와, 하다 보니까 재밌고 좋아서 나 이거 더 잘 해보고 싶어, 하는 자발적인 마음까지 막을 이유는 없으니까요.


아, 그러네요. 괜찮은 방법인데요? 근데 이렇게 대화하는 거 되게 좋은 것 같아요. 저 몇 년 동안 못 푼 고민인데 이게 풀리네요. 똑같은 나인데 왜 갑자기 아이디어가 괜찮아지지?


- 그러게요. 저도 신기하네요. 일단 얘기를 더 해봅시다. 유럽에서 교환학생을 할 때, 여행 다닐 때마다 그 지역의 미술관이나 독립서점을 갔잖아요. 그럼 그림이나 글을 되게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좋아하긴 해요. 근데 또 막상 좋아하는 작품이나 작가가 뚜렷하게 있는 건 아니라서, 누구한테 이게 취미다! 라고 말하기는 부끄럽네요. 아는 것도 없어서.


- 에이, 그럼 그냥 기억나는 대로만 말해 보세요. 어떤 그림과 어떤 글이 좋았는지 정도요. 명확한 작품 말고.


음, 저는 수채화보다는 유화 혹은 아크릴화를 좋아해요. 특히 일반 붓이 아니라 나이프로 그린 것도 좋아하죠. 물감을 얹듯이 그리는 거요. 어떤 순서로, 어떤 압력으로 물감을 얹었는지 그 과정이 생생하게 펼쳐지는 것만 같거든요. 두터운 물감의 질감을 이용해 붓질의 결들을 그대로 살려둔 그림들도 좋아해요. 작가의 붓터치가 어느 순서와 어떤 방향으로 움직였는지 확연히 보이는 두꺼운 그림들, 그 특유의 묵직함이요. 전시장 내부의 조명을 받으면 두꺼운 자국 간 격차들에 아주 옅은 그림자가 생기거나 마른 물감이 빛을 받아 반짝거리기도 하는데, 붓터치 한 겹마다 각자의 흔적이 살아 숨쉬는 느낌이라 좋았어요.

생각해보니 제가 해리포터 시리즈를 몇 번씩 읽었던 이유도 비슷하네요. 그 작품의 인물들은 주인공을 위해 존재하는 캐릭터들이 아니예요. 소모품 느낌의 엑스트라가 아닌 거죠. 서사가 정말 구체적으로 다 있어요. 각자의 삶과 각자의 사연을 갖고 있는데, 다만 해리를 연결고리로 인연을 쌓고 있는 것일 뿐이죠. 그렇게 해리포터는 '해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해리가 속한 '세상의'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미국 드라마 중에 빅뱅이론이라고 괴짜 과학자들의 코미디 시트콤이 있는데요. 그 많은 시리즈를 엄청 반복해서 봤는데, 각자의 캐릭터들이 서로의 모자람을 드러내놓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그 다채로운 캐릭터성에서 즐거움을 느꼈던 것 같아요. 음악도 최근에 오아시스나 더 발룬티어스 같은 밴드 앨범에 빠졌는데, 보컬의 목소리뿐 아니라 악기들의 소리가, 그들의 하모니가 좋았어요. 음악을 들으면서 보컬 외에 그 선율들을 구성하는 다른 것들의 소리에도 집중하면서 들어본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밴드 노래는 그렇게 되더라고요. 예능도 무한도전 돌려보는 걸 좋아하는데, 저번에 볼 때는 못 보고 지나친 멤버의 우스꽝스런 리액션을 새롭게 발견했을 때 좋아하기도 해요.

아, 이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건 어울림의 향연이에요.


- 외로움을 싫어하면서도 외로움을 자처하는 본인에게, 굉장히 의외이면서도 어울리는 표현이네요. 그동안 칭찬도, 사람 만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그랬잖아요. 인간관계에 두려움부터 앞서는 것 같았고. 그런데 여럿이 어울리는 걸 목격하는 게 좋다는 건, 그것들은 사실 일종의 방어기제 아니었을까요? 취미도, 좋아하는 게 있지만 그것들을 잘 할 자신까지는 없어서 취미라고 이름 붙이질 못 했던 것 같아요. 사람들과 인연을 맺는 것도 사실 하고 싶고 즐길 수 있지만, 끊어지는 게 두려워서 잘 못 하고 있던 것뿐일 수 있어요.


그럴지도요. 사실 어릴 때 공연 기획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연극이나 영화 감독, 아니면 전시 기획이라거나. 사람들이 어울려 각자의 세계를 표현하고, 그걸 또 감상하고, 의견을 나누고. 그런 것들을 보는 게 재밌고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지금 준비하긴 너무 늦은 것 같지만, 관람객의 입장에서라도 종종 즐겨봐야겠어요.

갑자기 생각났는데요. 날씨가 정말 좋은 스페인 여행에서, 그리 높지 않은 건물에서 창문 아래쪽 거리를 봤는데요. 밝은 햇빛 아래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인지, 그 자체가 반짝이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 있어요. '살아감'을 느낄 때 제 우울은 옅어지는 것 같아요. 그저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아'내는' 것이요. 그 때 사진을 찍은 게 있는데 참 마음에 들어요. 아, 사진 하니까 또 생각 났는데 저 사진 찍는 거 사실 좋아해요.

저는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평온을 느끼는 사람인 것 같은데요, 사진을 찍을 때는 세상과 연결된 기분이 들어요. '사진을 찍는 것', 즉 순간을 포착하는 일은 빛의 방향, 배경의 색감, 중심 대상의 구도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만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법이라 세상을 면밀하게 관찰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세상의 구석구석에, 순간순간에 정이 들어요.


- 오, 사진을 어디서 좀 배우셨나요?


음, 아뇨, 사실 사진 찍는 건 배운 적이 한 번도 없는데요. 그냥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서 인스타에 올릴 뿐인데, 사람들이 칭찬을 많이 해 주고 카메라 뭐 쓰는지 물어본 적도 많아서 머쓱하고 기분이 이상했어요. 가뜩이나 칭찬을 어색해하는데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에 칭찬을 받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죠. 사진 동아리를 한 적도, 사진에 관해 뭔가 배운 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여행 사진을 올릴 때마다 인스타그램 DM을 채우는 칭찬에 의아해하다가 이런 생각을 해 봤어요, 그간 내 노력의 방향과 '사진 잘 찍는 법'이 우연히 일치한 구석이 있나 본데 그게 뭐지, 라는 생각이요.

사진과는 전혀 다른 태를 띄는 것들에 노력을 기울여 왔어요. 그럼에도 그것들은 양태만 다를 뿐 중심을 이루는 무언가가 꽤 흡사한 것 같아요. 햇빛의 방향 및 색의 온도, 배경과 중심 대상의 조화, 그리고 그 장면에 담긴 맥락적 의미와 순간적 감흥이 내게 깊은 기억으로 남을 가능성. 이 세 가지가 충족된 사진이 제게 있어 'A컷'의 정의인데요. 이건 사실, 제가 한때 진지하게 진로로 삼고 싶었던 학문의 특징을 담고 있기도 해요. 여기서는 그냥 사회과학 정도로 표현할게요.

삶의 다양한 양태를 관찰하고 그것의 꿰뚫는 구조적 폐해를 헤집어 '옳음'을 위해 탐구하는 것, 물론 이것에는 '무엇이 옳음인지'에 대한 논쟁도 당연히 포함될 테죠, 여튼 이것이 제가 정의하는 사회과학의 의미이자, 제가 사회과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업으로 삼고 싶어하던 이유였어요. 그 공부가 재밌었어요, 정말로. 물론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은 재미인 것은, 레포트를 쓰면서 우는 날들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세상의 아픈 장면들에 관해 연구하는 일이니까요. 그러니 그 학문의 재미란, 유희적 의미보다는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음을 실감한다는 것에 가까웠죠.

어찌되었건 사진 찍기와 사회과학 연구는, '애정 어린 시선을 늘상 유지하며 주위 것들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점에서 닮아 있어요. 저는 누군가 제 사진을 볼 때, 중심 대상을 구성하는 요소 하나하나를 살피되 구석진 곳의 '나머지 것들'에도 눈길을 주길 희망한다. 떠다니는 구름과 듬직한 산 밑의 외딴 집 사진을 찍었다면, 푸른 초원을 지키는 파수꾼과 같은 그 집에 관심을 기울여도 좋고, 갖가지 장식으로 꾸민 통나무집의 주인이 그 집을 꾸미는 과정을 상상해 보아도 좋다는 뜻이에요. 세상의 질감과 색채를 포착하고 그것들을 즐기는 사람들의 삶, 그걸 느끼는 게 좋아서 사진을 찍고 다녔던 것 같아요, 유럽 여행 내내.


- 진심으로 좋아하는 취미가 있었네요. 어디 가서 당당하게 취미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요.


앞으로는 그렇게 해 볼게요. 근데 요즘 공황 증상이 좀 심해서 사진 찍으러 바깥을 자유롭게 못 다니겠더라고요. 지하철에서도 목적지로 가는 중간에 내려서 사람 없는 곳에서 쉬다가 가고 싶고, 그런 정도라서요. 그래서 비슷한 다른 취미가 없을까 고민이에요.


- 사진을 글로만 바꿔 보면 어때요. 글은 방 안에서, 혼자서도 쓸 수 있잖아요. 그동안 찍은 사진을 구경하다가 퍼뜩 생각나는 단어들을 주제로 짧은 글을 써 봐도 좋고요. 저와의 문답식 글 말고, 시도 괜찮고, 짧은 소설도 괜찮고, 아니면 짧은 에세이도 좋고.


괜찮네요. 한번 해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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