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에게(임대형, 2019)
영화는 한 겨울 눈이 소복이 쌓인 일본의 어느 마을에서 노년의 여성이 자신의 집 탁자에 놓여있던 편지를 대신 부쳐주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내용을 듣자 하니 윤희라는 여성에게 보내는 편지임을 예상할 수 있다. 그 편지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한국의 여학생이 받아 읽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새봄. 누군가의 어린 시절이 담긴 앨범을 보며 편지의 내용을 읽는 새봄. 분위기를 보아하니 편지의 대상이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장면이 넘어가고 지친 기색이 역력한 중년의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어느 공장의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으로 새봄의 엄마이자 편지의 대상인 윤희였다. 윤희는 일과를 마친 후 바로 귀가하지 않고 집 앞에서 한숨 섞인 담배 한 대를 태운다. 윤희의 발걸음에 맞춰 복도식 아파트의 불이 하나둘씩 켜지고 집 앞에 다다르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한 남성이 등장한다. 그는 윤희와 이혼한 전 남편이었다. 술에 취하는 날이면 종종 찾아왔는지 그런 그를 지겹고 두려워하며 윤희는 냉정하게 뿌리친다.
여학생은 편지를 읽은 뒤로 엄마의 과거를 더욱 궁금해한다. 사진 촬영이 취미인 그녀는 사진관을 운영하는 삼촌에게 찾아가고 윤희의 전 남편이자 그녀의 아빠가 근무하는 경찰서를 찾아가 엄마의 과거를 캐묻기 시작한다. 이후 집에서 엄마를 만난 새봄은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윤희에게 질문 세례를 퍼붓는다. "엄마 어렸을 때 인기 많았다며?", "엄마는 왜 살아?", "엄마 아빠 여친 생긴 거 알아?", "겨울인데 왤케 눈이 안 오냐.. 엄마 우리 해외여행 갈까? 눈 많이 오는 대로", "친구들 얘기 들어보니까 다들 대학 가기 전에 해외여행 간 데" 등. 평소와 다른 새봄의 태도에 윤희는 수상함을 느끼고 짜증을 낸다.
다음날, 새봄이 편지를 다시 우편함에 넣어둔 걸까? 귀가 후 확인한 우편물 중에서 일본에서 온 편지를 발견한 윤희는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쥰이라는 여성에게서 온 편지였다. 편지를 보내온 그 사람이 보고 싶었던 건지, 윤희는 식당 영양사에게 며칠 휴가를 다녀와도 괜찮은지 물어본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라곤 자리를 비우게 된다면 못 맡아 드린다는 협박성 대답이었고 이를 불쾌하게 느낀 윤희는 일본 여행을 결심하고 딸과 함께 일본으로 향한다. 일본에 도착한 윤희는 쥰의 집 앞을 서성이기 시작한다. 그때 문쪽에서 인기척이 나자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윤희. 먼발치서 그동안 그리워했던 그녀를 바라보며 뛰는 가슴을 부여잡는다. 그 둘은 이어질 수 있을까?
영화는 전체적으로 큰 요동 없이 고요하게 흘러간다. 흩날리는 눈발이 코 끝을 스치며 풍겨오는 차가운 겨울 냄새, 누군가에겐 평범할 수도, 평범하지 않을 수도 있는 가정사와 사랑 이야기. <윤희에게>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지극히 내 취향이었다. 다만 퇴근 후 운동을 다녀와서 식사와 샤워까지 모든 일과를 마치고 마무리로 시도했던 <윤희에게>는 강력한 수면제였다. 그래서 쉬는 날 오전 다시 도전했다. 잠잠한 영화 속에서도 느낄 수 있었던 긴장 요소가 있었다. 윤희가 과연 편지를 보내온 그녀를 만날 수 있을지 그리고 만난다면 어떤 전개가 펼쳐질지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그 과정 속에서 새봄의 역할이 눈에 띄었다. 윤희와 쥰의 만남을 도와주는 새봄은 영화 초반엔 다소 미성숙하고 무뚝뚝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부모님의 이혼을 겪었고 편지를 통해 평범하지 않은 엄마의 과거를 알게 된 후 마음이 싱숭생숭할 법도 한데 오히려 엄마의 사랑을 응원하고 이어주는 역할을 자처한다.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엄마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응원하는 새봄이 사랑 앞에 망설이는 윤희보다 어른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여행지에서 계속 붙어있어서인지 서로 몰랐던 부분들을 알아가며 딱딱했던 둘의 사이가 점점 말랑해지기 시작한다. 윤희는 새봄의 어리숙한 부분들, 이를테면 몰래 담배를 피운다던가 연애 중인 사실들을 감싸주고 있었고 새봄은 윤희의 '모르는 척'에 당해왔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다. <윤희에게>를 보면서 혹자는 "그래서 윤희와 쥰이 어떻게 되는데?"라며 단순히 그들의 성사 여부만을 기대하고 말아버릴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혼한 가정 및 동성애와 같은 "사회에서 외면받을 수 있는 문화를 당신은 어떻게 바라보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자면 이렇다.
당신의 사랑은 평범한가요? 특별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