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하는 이들을 보며
사상누각(沙上樓閣)에 사는 사람이 나인 것 같다.
"나가면 지옥이라고 하는데, 사실 지금도 지옥 같아..."
회사에 희망퇴직이 공지되었다. 이번에 누가 나간다더라, 누구는 남기로 했다더라 하는 말이 넘쳐난다. 이미 최근 분위기는 우리나라의 상황과 비슷하게 냉랭했다. 희망퇴직이 아닌 자발적인 퇴직으로 더럽고 치사한 직장을 떠난 사람들이 꽤 있었다. 앞으로 회사 쪽으로는 지나도 가지 않겠다는 결연한 각오가 보였다. 다만 현재 나가면 영락없이 굶어 죽을 거라는 판단으로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다. 버티는 심경으로 떠나는 사람에게 작별인사를 하면서 부러워하거나 공감하지 않으려고 애쓴 것이 사실이다. 아직 날지 못해 둥지를 떠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절벽 위의 둥지 안의 겁쟁이로 살아가고 있다. 평생 찾아다닌 파랑새가 사실 나였구나.
"눈먼 자들의 직장"
책임감이 있는 사람들은 몸과 마음의 상처를 입고 스스로 직장을 떠나지만, 얌체 같은 사람들은 여전히 책임을 떠넘기면서 자신의 얼굴을 비추는 일을 벌인다. 그리고 모두가 도와주지 않아서 일이 진행이 되지 않는다며 수습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추가로 어이없이 스스로 자신의 승진과 포상을 노래한다. 《눈먼 자들의 도시》(주제 사라마구, 해냄출판사)에서 전염병으로 눈먼 자들 사이에서 눈먼 사람들을 인도하는 안과 의사의 부인처럼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고 싶게 만드는 보고 싶지 않은 잔인한 풍경을 직장에서도 만나게 된다. 자신만이 정답이라고 고집을 피우며 수시로 자살골을 차는 리더부터 그 주변에 고전물에서나 봤던 환관들이 나의 직장에 엄연히 존재한다. 가끔 자괴감에 빠져 스스로 눈을 감게 만든다.
"지옥에 사는 건가?"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한다는 말처럼 직장 분위기는 넷플릭스 시리즈물 《지옥》(연상호 연출)의 혼돈 못지않은 분위기이다. '박정자 죄인은 보름 뒤 2024년 12월 1일 퇴직한다.'라며 엉뚱한 직원들이 퇴직행 고지를 받는 상황에 직장인들은 모두 죄인이라는 사이비 교주가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썩은 우유를 먹으면 불로장생한다는 개소리처럼, 스스로의 무능으로 퇴직하는 것이라고 자신을 탓하라는 설교를 진리처럼 늘어놓는다. '정진수 의장님 이제는 무엇을 하면 되나요?'라고 물어도 누구도 무엇을 해야 할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닐까 싶다. 모두의 삶이 다양한 모습이듯 지옥의 모습도 다양하다.
"퇴직 인사가 도착했습니다."
퇴직한 사람들은 아직 부모의 도움이 필요한 어린 자식들에게 조금의 보탬이라도 되고자 자신을 내려놓고 계속 일을 해고 싶지만 상황이 녹록지 않다. 누군가는 직장에서 받았던 '의전'물을 빼기 전에는 다시 일자리를 잡기 어려울 것이라고 조언하지만, 과연 홀딱 발거 벗으면 다시 밥벌이를 구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대출이 없어 다행이라고 말하던 선배들도 노후에 대한 대책이 없이 퇴직을 앞두고 있다면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살고 있는 기분이라 말한다. 퇴직을 앞둔 선배가 이메일을 전체 직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자신의 퇴직을 알리면서 자신의 직장연대기를 정리한 장문의 글이었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직 퇴직 후에 어떻게 살지 결정하지 못했다는 마무리였다. 예전 선배가 연금이 나올 때까지 앞으로 뭐 하고 사냐는 질문에 '제발 잘 사세요!'라고 답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신이 죽기 전에 후회할 23가지 P.54
․ 기회가 왔을 때 여행하지 않았던 것
․ 외국어를 배우지 않았던 것
․ 싫은 사람과 불편한 관계를 이어갔던 것
․ 남성, 여성의 역할에 갇혀서 산 것
․ 끔찍하게 싫은 직업을 그만두지 않은 것
․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 몰랐던 것
․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것
․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나치게 신경 쓴 것
․ 나보다 다른 사람을 우선시한 것
․ 과거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 원한을 품고 살았던 것
․ 자신답지 못했던 것
․ 너무 열심히 일한 것
․ 행복한 순간을 위해 잠깐 멈추지 않았던 것
․ 사회적 기대에 맞추어 나를 가둔 것
․ 마음이 식은 사람에게 매달렸던 것
․ 한 번도 큰 위험에 도전하지 않았던 것
․ 아이들과 충분히 놀아주지 못한 것
․ 너무 많은 걱정을 했던 것
․ 별 것 아닌 일로 신경을 너무 많이 쓴 것
․ 사랑하는 사람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 것
․ 많은 사람 앞에서 재능을 펼쳐보지 못한 것
《이제부터 민폐 좀 끼치고 살겠습니다》(고코로야 진노스케, 박재영, 걷는나무, 2018.07.02.)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물론 오늘도 두려움으로 직장에 나가지만 내가 사장도 아니고 나의 밥벌이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누구나 나이가 들어간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씩 구석으로 몰리는 느낌이다. 밀려나다 밀려나다 더 이상 밀릴 곳이 없는 사람들이 몰래 눈물을 흘리며 자리를 떠난다. 아직 어두운 구석으로 밀리기 전에 단단한 경제적 기반을 만드는 것이 퇴직 전에 숙제로 남아있다. 누군가 떠난 자리를 누군가 또 메꾸다가 또 누군가 떠나갈 것이다. 그 자리가 나의 인생이지 않기 위해서 눈치 보지 말고 내 인생을 살아야 한다.
《비상》
나도 세상에 나가고 싶어. 당당히 내 꿈들을 보여줘야 해.
그토록 오랫동안 움츠렸던 날개 하늘로 더 넓게 펼쳐 보이며 날고 싶어
(…)
이젠 세상에 나갈 수 있어. 당당히 내 꿈을 보여줄 거야.
그토록 오랫동안 움츠렸던 날개 하늘로 더 넓게 펼쳐 보이며
다시 새롭게 시작할 거야.
더 이상 아무것도 피하지 않아.
이 세상 견뎌낼 그 힘이 돼줄 거야
힘겨웠던 방황은
(임재범, 1997.07.01.)
죽기 전에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말 것을 깨달았다는 말처럼 쓸데없이 남탓하며 눈치 보며 살지 말고 현명하게 일하자고 다짐한다. 부러질지언정 꺾이지 않는 게 중요한 사람도 있고, 다가오는 비바람은 유연하게 피하는 것이 중요한 사람도 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하루를 버티지만, 오늘도 스스로 나의 퇴직을 결정할 수 있는 유연하고 당당한 내가 되기를 소망한다.
"이제 세상에 나갈 수 있어. 당당히 내 꿈을 보여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