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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재천 May 01. 2024

찰스 모리스, 가장 이상적인 선교사로 칭송

평양, 영변 및 원주에서 사역하고 양화진에 안장

찰스 모리스 선교사(1869~1927)는 평양을 중심으로 북한  지방에 복음을 전하 평북  선교부를 하였다. 선교 후반기는 원주를 중심으로 강원도 복음화에 기여하였다. 동료 선교사에게 <가장 이상적인 선교사>로 칭송받은 선교사이다.

그는 1869년 5월 아일랜드 퀸즈 카운티에서 태어나 19세 때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00년 드루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9월에 목사 안수받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선교사의 소망을 가진 것이 한국 선교의 동기이다.


그는 1900년 북 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1901년부터 평양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평양 이북 지역인 영변, 혜천, 원산, 선천, 맹산 등 10여 개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평양에서 선교 사역 중이던 1903년 9월, 평양 외국인학교 교사 루이스 오길비와 결혼하였다. 이 시기에 존 무어 선교사가 평양에 파송되어 함께 동역하였다.


1906년 평안도 영변에 독립 선교부가 설치되면서 영변 감리사로 선정되어 변으로 거주지를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6년간 사역하며 40여 개 교회를 세웠고 8명의 목사와 장로를 배출하고, 3천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또 1907년 영변에 숭덕 학교와 1908년 숭정 여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도 매진했다.


그가 영변에서 선교하는 동안 예배 처소 문제로 소란이 나서 신변의 위험이 있는 경우가 발생하였는데, 어느 선교사가 권총을 사용하려 했을 때 그는 <죽임을 당할지라도 무기를 쓰지 말자>로 외치며 비폭력으로 시민의 소란을 진정시켰다.


그는 1912년 다시 평양으로 이동하여 평양 및 해주 지역 복음화를 위해 활동하였다. 지역 사경회를 인도하면서 성경 강해 및 조혼 문제, 위생 개선 등 생활에 대해서도 강조하였다.


그 후 1917년 6월부터는 당시 가장 취약한 원주 선교부의 감리사로 전임되어 강원도 지역의 복음화 임무를 부여받았다. 원주에 거주하면서 인접한 제천, 영월, 평창, 정선 등 산간 지역에 복음을 전하였다. 강원도 지역이 산간지역이라 순회 선교가 힘든 여건이었으나 몸을 사리지 않고 선교에 전념하였다.


노블 선교사는 그를 <가장 이상적인 선교사>라고 평하며 너그러운 마음과 사랑을 가졌고, 봉사정신, 책임감, 위트와 유머 감각이 뛰어난 그의 인간성을 칭송하였다. 이 외에도 1918년 원주에 기숙사 건립에 기여하였고, 1919년~1925년까지 국제 선교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한국인 사역자 양성 등 다양한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모리스 선교사에게 아쉬움이 남는 기록이 있다. 1919년 3·1 운동을 원주읍에서도 계획하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찾아온 청년들을 일본 경찰에 알려 시민의 원성을 샀다. 그는 종교와 정치는 철저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 것으로 보이는데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1926년 11월 강원도 동해안 일대에 순회 전도하는 가운데 건강이 악화되어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으며 이듬해 1월 세브란스 병원에서 소천하였다. 그의 유해는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웨슬리의 기도문인 < Thus, O Christ, are all I want more than in thee I find>라고 적혀있다.


그를 기념하는 예배당과 기념비가 남아있다. 1925년 그의 선교사역 25주년을 기념하여 영변에 <모리스 기념 예배당>이 건립되었고, 원주 제일 교회에는 <모리스 선교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28년 당시 강원도 감리사였던 신흥식 목사(3.1 운동을 주도한 33인 중 한 사람)가 그를 기념하여 비를 세웠고, <선교에 충성을 다하고 힘을 다 쏟았다(선교진충갈력)>는 문구를 비석에 기록하였다. 기독신보는 그의 죽음에 대해 <그의 죽음은 한국 기독교계의 큰 손실이며 우리는 세대가 다하도록 그를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그는 관후한 목사, 열심 많은 선교사,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 평하였다.


그가 소천하기 전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죽어도 조선에서 죽겠노라>고 말하고 노블 선교사에게 <내가 조선 형제를 위하여 일을 더하지 못하고 죽는 것은 실로 유감이니 이 말을 그들에게 전하여 주시오. 또 나는 나의 길을 끝까지 와서 보니 하나님의 길에 회전(回轉)은 많으나 장애는 하나도 없었다>라고 유언했다.


부인 루이스 오길비는 평양 남산현 교회에서 웹잇 청년회로 모였을 때 관악기(라팔)를 연주하였고, 부인 사경회를 통하여 성경 공부를 지도하였다. 또한 원주에서 유치원을 설립하여(1921-1922) 운영하였다. 그녀는 남편이 소천한 뒤에도 원주에 남아 선교활동을 계속한 후 귀국하였다. 슬하에 큰 딸 샤롯테와 둘째 딸 머리얼이 있다. 그들이 원주에서 살았던 사택은 현재 문화재로 등록되어 남아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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