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라 그레이엄, 한국에 묻히기를 원한 선교사
수피아 여고 초대교장 및 광주 외곽 지역 순회 선교사
엘라 그레이엄 선교사(엄언라, 1869~1930)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광주 수피아 여고 초대 교장을 지내고, 광주 근교 농촌에 복음을 전한 여성 선교사이다.
그녀는 1869년 미국 북 캐롤라이나 주 울라에서 태어나서 교육 대학을 졸업하였다. 졸업 후 활동 및 선교 동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1907년 비교적 늦은 38세에 남 장로교 교육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한국 생활에 적응 기간을 거친 후 전남 광주 선교부에 배정되어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광주에는 여성을 위한 학교가 없어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보고, 1908년 유진 벨(배유지) 선교사 부인과 함께 여자 아이들을 유진 벨 선교사 사랑방에서 가르쳤는데 이것이 광주 수피아 여고의 시작이다.
이 학교는 1909년 정식으로 학교로 인가받고, 엘라 그레이엄 선교사가 수피아 여학교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1년간 헌신하였다. 그 후 안나 맥퀸(구애라) 선교사가 2대 교장이 되어 학교를 발전시켰다. 1911년 미국인 스턴스 여사로부터 오천 달러를 기부받아 3층의 회색 벽돌 건물을 지으면서 학교의 면모를 갖추었다.
* 수피아 여학교 이름은 학교 교사 건축을 위해 기부한 스턴스 여사가 일찍 사망한 동생 제니 스피어를 기념하여 기증하였기에 그 뜻을 따라 학교명을 수피아 여학교로 명명했다.
그녀는 교장을 물러주고 광주 인근지역을 방문하며 복음을 전하는 순회 전도 활동에 헌신했다. 그녀가 가장 오랜 기간 순회 선교 활동을 한 선교사 중에 한 사람이다.
언덕을 넘고 골짜기를 지나 시골 마을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저녁에 여성들을 모아서 성경 공부했는데, 이 시간에 가정 일을 마친 여성들이 참여할 수 있는 시간대였기 때문이었다. 한 눈을 보지 못하는 여성에게 복음을 전하고 백내장 수술을 통해 눈을 뜨게 한 기록이 있다. 또한 당시 광주에서 부흥 집회 시 축호 전도하여 북문안 교회가 가득 찼다고 전한다.
그녀는 1926년 건강이 악화되어 20년의 한국 생활을 마감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병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그녀는 한국 땅에 묻히기를 소원하여 아픈 몸을 이끌고 광주에 돌아왔고, 수피아 여고 교장 후임인 구애라 선교사와 함께 생활했다.
그러나 결국 1930년 9월 심장병과 그 후유증으로 세브란스 병원에서 소천했다. 그녀의 시신은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지에 안장되었다. 이곳에 최초 안장된 오웬 선교사 옆에 두 번째로 안장된 것이다. 그녀의 장례식은 9월 가을에 거행되었는데 화창한 날씨 속에 많은 꽃들의 헌화가 아름다웠다고 전한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