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데이비스 가문의 2대 선교사로 여성교육에 헌신
마가렛 데이비스 선교사(대마가레, 1887~1963)는 부산 일신 여학교 교장으로 25년 활동하면서, 부산의 여성 교육에 헌신한 선교사이다.
그녀는 1887년 호주 빅토리아 주 번인용이라는 시골에서 출생하여 지역 도시인 발라랏에서 성장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발라랏 지역에서 목회하였는데, 그는 한국 최초 호주 선교사인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의 친동생인 존 데이비스이다. 즉 그녀는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의 친 조카이다.
그녀는 발라랏에서 사학 명문인 장로교 여학교를 거쳐 1907년 멜버른 대학교 문학부 석사로 졸업하였다. 그리고 삼촌 헨리 데이비스의 영향을 받아 한국 선교사로 자원하였고, 디커니스 훈련원에서 선교 훈련을 받고 한국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의 영향으로 그의 조카인 마가렛 데이비스 외에도 마가렛 동생인 진 데이비스 선교사도 내한하여 진주 베돈 병원 의사로 헌신하였다.
그녀는 1910년 11월 호주 장로교 선교사로 부산에 도착했다. 이때 호주 해외 선교부의 한국 방문단과 함께 왔다.
그녀는 내한 후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문화에 적응하면서, 부산 일신 여학교에 배치되어 사역을 시작했다. 1911년 말에는 교장인 스콜스의 휴가로 인해 일시적으로 진주 시원 여학교에서 근무하였다.
1914년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일신 여학교 교장으로 학생을 가르쳤고, 주일에는 동래 교회에 가서 여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또한 인근 지역인 양산 및 언양 지역을 방문하여 여자 성경공부를 인도하였다. 또한 수영 지역에 주일학교를 만들고 교육하는 사역에도 기여하였다.
1919년 3.1 운동 시기에는 일신 여학교 학생들의 시위 참여로 인해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일신 여학교는 학생들이 매년 증가하여, 1925년 동래 지역에 학교 건물을 증축하였다. 그녀는 자조반을 만들어 재봉질을 가르치고, 학생들의 자립을 도왔다. 1925년 말 수술을 받고 회복을 위해 호주로 가서 요양하였다.
1927년 건강을 회복한 후 다시 한국으로 와서 일신 여학교 교장 업무를 지속하였다. 1932년에는 일신 여학교가 정부로부터 정식 학교로 인가를 받아 학생들이 더욱 증가하였다.
1939년 일본에 의해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시기에 그녀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여, 결국 일본에 의해 교장의 사임 압력을 받게 되었다. 1940년 1월 그녀는 교장직을 사임하고 일신 여학교는 그해 7월 비기독교 단체인 지역 공동체로 인계되었다. 그 후 일신 여학교는 동래 여학교로 교명이 변경되고, 성경 과목이 없는 일반 학교로 전환되었다.
1940년 전운의 기운이 감돌던 시기여서 호주 선교부는 한국 선교사 철수를 결정하였고, 그해 6월 그녀도 다른 선교사와 함께 호주로 돌아갔다. 그녀는 25년을 일신 여학교 교장으로 봉직하며 헌신한 것이다.
호주로 돌아간 후 선교사의 소식을 전하는 《더 미셔너리 크로니클》 편집자가 되어 1960년 2월까지 19년을 봉사하고 일선에서 은퇴하였다. 그로부터 3년 후 1963년 6월 향년 77세로 소천하여 고향인 버우드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2022년 정부로부터 국가 유공자로 선정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