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엄마로 살기
학군지에 거주하는 이 엄마는 결국 자녀의 ‘대학입시’ 결과가 'mothering'의 성적표라고 여기는 한국의 문화를 씁쓸하지만 ‘사실 아니냐?’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의사 남편을 둔 전업주부인 그녀는 자녀들이 어릴 적부터 사교육을 많이 시키면 ‘왜 이렇게 극성이냐?’라는 반응을 들었고, 아이가 우수한 성적을 받아오면 ‘그 정도 했는데 당연하지 않으냐?’는 반응을 들었다고 했다. ‘의대입학’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을 때의 시댁 식구들의 소리 없는 '비아냥거림'을 벌써부터 상상하기도 했다고 했다. ‘우리 신랑은 오히려 아무런 반응을 안 해요. 별말이 없어요. 그런데, 제가 하자는 대로 다 하죠. 저희 애들 아빠는 애들 공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안 해요.’라고 한다. 불문율처럼, ‘애들 교육은 엄마가 다 알아서 한다. 아빠는 돈만 잘 주면 된다’의 분위기는 이미 한국 사회에서 팽배하다. 교육과 관련한 이 엄마의 mothering을 결정하는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우리 시어머님은 ‘나는 그 시골에서 사교육도 하나 없이 의대까지 보냈는데, 너는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집에서 얘만 키우는데 뭐가 힘들다고 하느냐'로부터 시작해서, ‘의대’ 정도는 당연히 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것이 일상의 반응이라고 했다. 사실이라 뭐라 할 말도 없다고 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아들을 어렵게 공부시킨 시어머님의 '업적'은 결혼 전부터 이미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무언의 압력'으로 입시제도와 대학입시의 변화등은 일절 언급도 하기가 힘들었다 했다. 의사 남편을 둔 전업주부인 이 엄마는 남들은 부러워하는 재정적 서포트를 할 수 있었다. 자녀교육과 관련한 mothering을 묻는 나의 질문에, 그녀는 남부럽지 않은(?) 인텐시브 마더링을 나열했다. 수학 사교육만 봐도 수능, 내신, 선행용 대비 수업으로 3개를 보냈다고 했다. (이 엄마가 사는 지역의 보통은 이 정도는 당연하다는 말과 함께) 나머지 모든 과목의 사교육은 너무도 당연했고,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 해외연수도 2년간 다녀왔단다.(그동안 병원을 운영하던 아빠는 혼자 한국에서 있었다-기러기 아빠-라고 얘기했다). 의사남편을 둔 엄마는 두 자녀를 모두 고 3 때 sky대학에 입학시켰다. 하지만, 주변의 모든 부러움에도 불구하고, 결국 ‘의대’를 한 명도 못 보냈다는 생각에 자녀에게 ‘재수’를 권유했다고 했다. 아들들도 엄마의 요구를 당연하다는 듯이 재수와 삼수를 했다고 했다. 결국 ‘재수’에 이어 ‘삼수’까지 해서 한 아들은 ‘의대’에, 한 아들은 서울대학교 입학에 성공시킨(?) 엄마는 그냥 '중간(?)은 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에 하는 말은, ‘의대’ 간 아들은 그래도 걱정은 덜었는데, ‘서울대’ 공대에 들어간 아들은 이제 무슨 일을 하고 살아야 할지 걱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걱정은 진짜 '진심'으로 느껴졌다. 대치동을 비롯해, 전국의 ‘의치한’ (의대, 치대, 한의대) 준비를 위한 입시학원이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성업 중’이라고 하는 말이 실감이 났다. 소위, '공부 좀 한다'는 학군지 엄마들 사이에서는 이제는 sky도 별것이 아닌 한국의 교육현장이다.
인터뷰에서 만난 중산층 엄마들은 가정에서 아빠가 함께 고등학생인 자녀의 교육을 위해 협조(?)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함께 아이의 학원에 픽업을 가고, 함께 수업이 끝날 때까지 커피숍에서 기다리다가 데리고 오는 등 여느 화목한 집의 일상이었다. 대부분의 아빠들이 이러한 자녀의 교육에서의 엄마의 mothering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듯 말했다. 하지만, 다른 부분도 있었다. 엄마가 느끼는 자녀의 교육에 대한 부담은 아빠의 그것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저희 애들 아빠는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해요, 공부 안 하는 걸 어쩌냐고.. 그렇게 말하죠.. 그런데 저는 그렇게 안되더라고요.’ 또 다른 엄마는 ‘사실, 남편이 돈 벌어오느라 애썼는데, ‘엄마가 집에서 애 교육을 제대로 시켜야지 뭐 했냐?’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죠.’. 이처럼, 우리 사회의 ‘자녀교육’은 성적, 더 나아가 ‘대학입시’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이에 대한 평가와 상급은 특별히 전업주부들을 타깃으로 하는 경우에 더 냉정하다. '워킹맘들은 일하러 나가서 돈 버느라고 시간이 없었다는 ‘면죄부’라도 있다'라는 말과 함께, 보이지 않는 압박에 전업주부들은 자꾸 스스로를 옥죄고 있었다. 어쩌면, 이 땅의 엄마들은 나의 사랑하는 자녀의 미래를 위한 교육이라는 자연스러운 동기 부여와 행복감이 아니라, ‘평가’에 더 무게가 지워지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었다. '누가 그렇게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연하게 애들 공부에는 투자하는 것 같아요'라는 이 엄마의 말 뒤에는 이러한 '당연한 교육적 투자'에서 소외되는 엄마들의 좌절과 무기력이 함께 공존하는 사회의 단면을 볼 수 있었다.
교육제도와 입시의 ‘항상성’이 보장되지 않는 한국의 사회, 제도적 문제점은 고스란히 엄마들의 몫이 되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사교육에서 실시되는 ‘입시설명회’와 각 시도교육청과 입시철에 시행되는 대학별 입학설명회에 한 번도 다녀오지 않은 엄마는 마치 원시인(?) 취급이라도 당할 것 같은 사회적 압력이 팽배하다. 잘해야 중간인 ‘엄마’의 자리에 대한 무게감을 간접 경험한 젊은 딸들의 개인적 결정은 ‘비혼’ 주의로 정착해 간다. 엄마처럼 할 자신이 없단다. 어렵게 마음을 먹고, 결혼도 하고 출산도 한 여성들은 ‘양육죄인’으로 내몰리거나, 자녀양육울 둘러싼 갈등이 급기야는 ‘이혼’으로 귀결되는 경우도 있다. 정말 마음 아픈 부분은 이미 어렵게 결혼을 결심한 젊은 부부들이 자녀교육에서 느끼게 되는 '좌절감'이다. ‘출산’을 장려하고,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정책을 내놓기 전에, 이미 태어난 아이들을 잘 양육할 수 있는 사회제도적 장치의 정비가 더 효과적일 것으로 여겨진다. 국가적 당면과제인 ‘저출산율’에 대한 정책적 지원으로 ‘더 낳자’라는 구호의 표방보다, ‘태어난 아이들을 소신껏 잘 키울 수 있게 하자’가 더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