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눈을 떴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일단 더 잤다.
완희형은 일찍 공부를 하러 나갔고, 1시에 형과 함께 가이드 일을 하는 유학생들과 식사약속이 있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겨우겨우 약속장소에 갔고, 유학생 친구들을 만났다. 처음 어색했던 공기는 금방 환기됐고, 금세 친해졌다.
빈은 건축을 공부한다, 울은 패션을 공부한다, 명은 영화를 공부한다, 슬은 연극을 공부한다. 대한민국에서 능력 있는 인재들은 다 파리에 있다며 각 분야 예술 공부를 하는 친구들을 형은 하나하나 소개해줬다.
르꼬르뷔제의 빌라사보아, 유니테 다비타숑, 그리고 파리의 오래된 건축물들, 귀족들에게 건물이 갖는 의미, 발코니 문화, 프랑스의 건물은 페인트까지 허가를 받아 외벽을 칠해야 하는 이유 등 빈은 내가 건축에 관심이 있어하자 아주 전문적이고 학구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파리에서의 계획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패션을 공부하는 울은 고등학생 때 여행온 파리에 반해 학교를 자퇴하고 맨땅에 헤딩하듯 파리에 왔다고 한다. 고등학생 때! 혼자! 고등학교와 대학공부까지 마치고 이제 다시 한국에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한국에서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 한다. 그녀의 용기와 추진력이 정말 대단했다.
명은 재미있는 친구다. 이 친구는 군대 전역 후에 혼자 프랑스에 왔다. 불어를 배우겠다는 일념 하에 프랑스에 한국인이라고는 찾을 수도 없는 곳에 찾아가 1년간 종이를 씹어먹으며 불어공부를 했고, 파리에 있는 국립대학에 입학을 했다. 프랑스의 국립대학은 학비가 없다. 영화공부도 다 마치고 지금은 가이드 일을 하며 글을 쓰고 있다. 프랑스어를 제일 잘하는 가이드라고 한다.
슬이누나는 만나기 전부터 완희형에게 많이 들었다.
형의 유학생활에 지대한 도움을 준 존재. 자끄르콕의 한국 졸업생 중 유럽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이다. 심지어 형이 일하는 가이드 회사에 작은 봉고차가 한대 있을 때부터 시작한 창립멤버인데 그 회사는 지금 차가 10여 대이다.
그런 누나도 이제 한국에 다시 돌아 올 준비를 차근차근하고 있다고 한다. 나의 대학 선배이기도 했다.
과연 청춘을 파리에서 보낸 이들에게 파리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lamour les baguettes paris. 노래 한곡에 빠저 파리에 온 나처럼 시작한 유학생활은 이젠 오롯하게 환상만은 아니겠지..?
진지하게 유학에 대해 생각을 했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이드일도 제안받았고, 도와줄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 한국 오면 바로 유학준비를 할 줄 알았는데 완희형이 준 불어기초책을 아직 펴보지도 않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하는 바람에 전날 예매했던 오랑주리는 결국 가지 못했다.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음에 서울에서 보자 혹은 파리에서 또 만나자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서희는 연극원에서 선생님이 오셔서 선생님과 시간을 보내고 우릴 만났다. 해 질 녘의 하늘이 너무 이뻤다. 흰 달이 떠있었고 구름은 파스텔을 뿌려놓은 듯했다. 파리 시청 앞 광장에서 아무 말 않고 앉아서 하늘을 보았다. 각자의 여운을 정리하는 시간 같았다. 하루만 더 있고 싶었다. 긴 여행일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짧았다.
마지막 와인을 마시고 센강 근처를 정처 없이 배회하다가 집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