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살 어린 아들을 두고 떠나는 엄마는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이제 56세밖에 안 된 너무 당차고 야무지시던던 내 또래 지인을 떠나보냈다. 큰아들은 24세이지만 늦둥이로 낳은 아들이 이제 7살이어서 더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 고통은 어떤 말로도 위로가 안 되기 때문에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이들을 지켜보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다.
교회에서 봉사할 때 지인의 큰아들을 중3 때 교사로 가르쳤다. 마침 남동생 아들인 조카도 같은 학년이었고 남학생만 5명인 반에서 많은 추억을 쌓았다. 수련회에 가서 2박3일 지내기도 하고, 반 모임 때 모여 볼링을 치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기도 했다. 주일이면 가끔씩 예배와 성경공부 후에 편의점으로 가서 간식을 사주면 그렇게 좋아했다.
그런 아이들이 어느덧 고3이 되었을 때 그 학생의 엄마께서 50세에 동생을 가졌다는 얘기를 듣고 놀라기도 했지만 진심으로 축하해드렸다. 특별한 건 첫째는 인공수정으로 어렵게 가진 아이였고, 그때 가진 아기는 자연 임신이라고 했다. 너무 갑작스럽게 생각지도 않은 일이어서 큰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낳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첫째와 붕어빵이어서 "리틀ㅇㅇ"이라고 불렀다.
건강하게 잘 자라고, 다복한 가족에게 갑자기 비극이 생긴 건 3년 전이었다. 아이 엄마께서 갑자기 자궁경부암 수술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주변에서도 자궁경부암 수술을 받은 사람들이 꽤 있어서 예후가 좋은 암이라고 생각하며 치료만 잘 받으면 된다고 안심했다. 2년 뒤에 재발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고 항암 치료가 시작됐다고 했다. 아직 어린 둘째가 걱정되었다. 주일이 되면 교회 집사님들과 유치부 선생님들이 돌아가면서 아픈 엄마 대신에 아이를 데리러 가고, 데려다 주고 하셨다.
큰 아들은 엄마가 수술했을 때는 군복무 중이었고, 제대 후엔 운전을 배워서 일주일에 세 번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다녔다. 대견했다. 중3 철없던 아이가 어느새 커서 철이 들고 성숙해졌는지 듬직했다. 10월까지는 엄마의 상태가 좋아졌다고 들었는데 11월부터 갑자기 안 좋아지더니 급기야 12월 초에 돌아가셨다는 비보가 들렸다. 56세로 떠나기엔 너무 이른 나이였다. 큰아이는 이제 성인이 됐지만 작은아이는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엄마 손이 필요할 나이인데 마음이 너무 아렸다.
장례식장에 가서 환하게 웃고 계신 영정 사진을 보니 황망했다. 조문을 하고는 큰아이를 도닥이다 보니 눈물이 절로 나와서 안고 같이 울었다. "뭐가 급하다고 이렇게 빨리 가셨다니..." 했더니 "그러게요. 샘. 천국에서 지켜보시겠지요..." 어떤 말로도 위로가 안 될텐데 스스로를 위로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할머니 두 분은 돌아가시고 고모가 다섯 분이 계시다는 말을 듣고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린 동생은 보이지 않아 묻자 고모랑 있다가 졸업 사진을 찍는 날이라서 유치원에 갔다고 했다. 아직 엄마의 부재를 알지 못하는 어린 아이, 그런 동생을 지켜봐야 하는 어깨가 무거워진 큰 아이, 둘 다 어찌 살아갈지... 호스피스 병동에서 열흘 간 투병하시다가 아들 눈을 마주하며 마지막에 힘겹게 미소를 지으셨다고 했다.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마지막 인사였으리라.
엄마의 마지막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큰 아들은 이제 더 씩씩하고 강해질 것이다. 부모의 그늘 아래 있는 것만으로 얼마나 큰 행복이었는지 실감하면서 어려운 일을 겪은 뒤 아빠와 남은 두 아들은 더 끈끈해질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또 살아가듯이 남은 가족이 슬픔을 이겨내길 바란다. 비록 엄마의 부재와 상실감은 크지만 잘 이겨내길 바란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데 슬픔이 조금이라도 덜어졌기를 간절하게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