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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j Jul 31. 2024

인연은 따로 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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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는 피천득 시인의 글이 있다. 또한 될 인연은 그렇게 몸부림 치지 않아도 이루어진다고 혜민 스님은 말했다.

 

이처럼 사람에겐 인연이 따로 있는 것 같다. 억지로도 안 되고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마음이 가야 한다. 특히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결혼할 사람을 만난다는 건 보통 인연이 아니다. 그 인연이 좋은 인연일 수도 그저 그런 인연일 수도 때론 악연일 수도 있지만 삶의 방향을 달라지게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 때 기차를 타고 친구와 서울역에서 내려 남산 도서관에 자주 다녔다. 공부는 핑계이고 기차 타고 다니면서 친구와 보내는 시간이 그냥 좋았다. 정작 공부한 시간은 몇 시간 안 되면서도 1시간 거리에 있는 남산 도서관까지 굳이 공부하러 갔나 싶지만 호기심 많은 여고생이었기에 가능했고 폼나는 추억으로 남게 됐다.


어느 날 기차를 타고 내리다가 우연히 한 남자가 눈에 띄였다. 같은 곳에서 내리고 심지어 우리집과 같은 방향으로 걸어갔다.  우리집 근처에선 처음 보는 사람이라 갑자기 호기심이 생겼다. 학창시절 나를 좋아하던 남학생이 있어도 외면했다. 시시한 또래가 아닌  대학생처럼 보여서 더 멋있어 보였나 보다. 처음 보는데 일단 키가 크고 단정한 이미지에 호감형이었다. 자주 마주 친 건 아니지만 몇 번 눈에 띄었을 뿐인데도 자꾸 시선이 가고 궁금했다. 그러다가 학교 문구점 하시는 분의 큰 아들이란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다. 내 앞에서 성큼성큼 걷던 그가 문구점 옆의 대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


그 문구점 아저씨 내외는 엄마와 한 교회 다니는 분이셔서 궁금한 마음에 엄마한테 여쭤보니 그 집 아들이 세 명이나 있다고 했다. 처음 안 사실이다. 큰아들은 대학생. 둘째가 나와 동갑. 막내는 동생과 동갑이라고 했다. 아들들 중에 대학생인 큰아들이 제일 훤칠하게 잘생겼다고 덧붙였다. 내가 본 그 남자였다.


문구점 주인이 바뀐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잘 몰랐다. 몇십 년을 문구점 하신 분들이 돈을 벌어 집을 사서 이사 가고 새로 인수하신 분들이었다. 우리집은 초등학교 옆이어서 어릴 땐 자주 드나들던 곳이지만 중.고등학교에 다니면서는 그 문구점엔 잘 가지 않게 됐다. 학교 주변에 제법 큰 문구점이 많아 집앞 문구점에 갈 일이 없다 보니 바뀐 것은 알았어도 자세한 건 알지 못했다.


이사오신 뒤에 엄마와 한 교회에 다니고 구역 식구가 되면서 자주 왕래 하신 분들이었다. 가까이 산다니 괜히 더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방학이 끝나니 볼 기회가 없었다. 오다가다 자주 마주치기를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서서히 잊었다.


고3 겨울이 되어 선지원 후시험이란 입시 제도가 처음 도입되면서 원서 접수를 먼저 하고 나중에 지원 학교에 가서 시험을 보게 됐다. 결과 발표를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드디어 합격을 확인했다. 너무 기뻤다. 경기도 변두리 학교에서 공교육 외에 특별한 공부 방법이 없던 나로선 수도권 대학 입학만으로 학교와 집안의 큰 경사였다.


대학 생활이 시작될 무렵 학교에 가기 위해 탄 버스에서 그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같은 대학에 다닌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다시 설레면서 인연이 되려나 싶었지만 접점이 없었다. 가끔 멀찌감치에서 보는 것 외에는 말이다. 호감이 간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먼저 마음을 표현할 용기는 더더욱 없고 정신없이 학교 생활을 하며 미팅도 하고 축제도 다니며 나름 바쁘다 보니 어느새 생각에서 멀어졌다.


한 학기가 지났을까 엄마에게 그의 입대 소식을 전해 들었다. 시작도 못해 보고 뜬구름만 잡았구나 싶었다. 하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이미 관심이 생긴 교회 오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 때 소나기처럼 지나가던 호기심으로 끝났다.


3학년쯤 되었을까. 엄마가 전한 소식은 나를 놀라게 했다.

 "문구점 아들이 제대했다는데 널 좋아했다지 뭐니? 자기 엄마한테 얘기해서 몇 번이나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댄다. 너랑 같은 학교 다니는 것도 알더란다."

 순간 흠칫했다. 인연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나도 호감이 있었지만 시기가 맞지 않았다. 그 때는 고등학생이었고 대학에 입학해선 교회에서 관심 갖던 지금의 남편과 사귀게 되면서 한창 푹 빠져 있을 때였다.

태연한 척하면서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사귀는 사람 있다고 했지. 그러니깐 아들이 진즉에 부탁했는데 왜 얘기를 안 했냐며 부모에게 뭐라 하더란다. 그 부모들은 아들이 입대 하니까 제대하면 얘기 하려고 했다며 널 놓쳐 아쉽다고 하더라. 호호호. 아들 잘 생겼던데..."


 '마음에 있었으면 직접 방법을 찾았어야지 다 큰 사람이 무슨 부모한테 부탁을 하냐. 사귀지도 않았는데 놓치긴 뭘 놓쳤다고...'

소극적인 성격과 용기 없음이 순간 어이 없음으로 바뀌면서 내린 결론은

 '인연이 아니었으니 그랬겠지.'

용기 내서 대시라도 받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니 약간은 아쉬운 인연이 될 뻔한 그 일이 잠시 떠오르며 혼자 피식 웃었다.


지금 남편과 잘 살고 있으니 인연이 됐으면 어쩔 뻔. 피천득 시인의 말에 따르면 그는 그냥 보통 사람이었고 남편은 현명한 사람이었다는 결론이다.

 '역시 인연은 따로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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