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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j Aug 26. 2024

발길이 머문 곳


요즘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건 사실 핑계였다. 놀러 다니고 편한 데만 길들여져 점점 책읽기가 귀찮아진 걸 합리화 시켰을 뿐이다.


내 루틴은 월. 수. 금은 오전에 수영. 수업이 없는 월요일은 보통 밀렸던 집안 일이나 계절 옷 정리. 밑반찬도 만들고 영화도 보는 등 비교적 한가하고 요긴하게 보낸다.


수업과 수영이 없는 화요일은 주로 약속을  잡거나 두 주마다 남편과 어머님 집에 들러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 수. 목은 오후에 수업이 있어 되도록 움직이지 않고 금요일은 오후 늦게 한 타임 수업이라 여유가 있다.


마음 먹고 계속 미뤘던 일을 하기로 했다. 수영이 끝나고 발길이 향한 곳은 시립 도서관이었다. 오래간만에 가서 다시 회원증을 만들었다. 아이들 어릴 때는 열심히 책을 빌리러 다녔다. 몇년 전 청소년 상담사 3급 자격증 시험 준비 할 때도 도서관에서 공부 하면서 열람실에서 자주 책을 빌렸던 곳인 데 정말 오래간만의 방문이다. 그 동안은 일주일 내내 일하느라 바빴고 아이들 케어로 정신없어 책 읽을 시간이 없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 바쁜 시간이 지났을 때는 이미 편한 데 길들어져 있었다. 그 날은 왠지 모르지만 내 발길이 도서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회원증에 사진도 들어갔던 기억이 났지만 이젠 필요 없었다. 대여와 반납 키오스크가 있어 책도 혼자 빌리면 되었다. 자동 시스템으로 바뀐 걸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끼고 진짜 오래간만이다 싶었다.


먼저 요즘 관심 있는 에세이 코너로 갔다. 너무 많은 책이 있어 고르기가 힘들었다. 2020년을 기준으로 출판된 5권의 수필을 골랐다. 두 주 빌릴 수 있고 한 주는 연장이 가능하다고 했다. 이제 금요일은 두 주마다 도서관으로 발걸음할 계획이다. 간만에 온 도서관이 새로웠다.


5권은 금방 읽을 것 같았지만 일주일이 지나 겨우 두 권 읽고 세 권 째 읽고 있다. 그 중 평소 읽고 싶었던 손미나 전직 아나운서 수필도 있어 아껴두고 있다. 지금 읽는 책은 <잔잔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라는 정영욱 작가의 수필이다. 정영욱 작가는 (주) 부크럼 출판사 대표라는 이력에 50만 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사실을 알았다.


짧고 간결한 글에 와닿는 문장들이 많다. 젊음도 한때. 무너짐도 한때. 찬란함도 한때. 인고의 시간도 한때임을 잊지 말라는 말. 영원히 무너지지도 찬란하지도 않을 거라는 말.


사실이다. 인생은 기복이 정말 많다. 죽을 것 같이 마음이 아프다가도 다시 회복한다. 지나갈 것 같지 않던 힘든 고비도 어찌어찌 지나간다. 영원한 것은 없다.


50대 중반이 되니 그 바빴던 시간이 다 어디로 흘렀는지 놀랄 때가 많다. 정말 흐르지 않을 것 같이 그대로였던 시간들이 어느새 지나가고 바쁘던 젊은 날 대신 여유와 안정을 맞은 중년의 날이 왔다. 나쁘지 않다. 젊으면 젊은 대로 좋았고 나이가 드니 한층 성숙해진 지금의 나도 좋다.


아이들과 복작복작 거리며 살던 때도, 남편과 둘이 조용하고 살고 있는 지금도 좋다. 영원한 건 없다. 항상 내옆에서 든든히 우리를 지켜주실 것 같은 아버지와 아버님도 떠나고 이제 연로해져 80세가 넘으신 두 어머님의 모습이 곧 내 모습이 될 거란 사실도 안다.


이애경 작가의 <너라는 숲> 이란 책에서는

눈에 띄는 글이 있었다. 주로 사랑의 의미를 전하고 있는 글에서 두 가지 글이 꽂혔다.


집착


"상대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상대방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나 스스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에게 집착한다.


내가 얼마나 그에게 소중한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나 스스로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스스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집착한다는 말이 공감 되었다. 사랑에서 집착은 아주 위험하다. 지나치면 구속하고 의심하고 극단적인 모습으로 치닫게 될 때도 있다. 그 집착이 상대방을 믿지 못해서가 아닌 스스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니 설명이 된다.


익숙함의 아이러니


"서로에게 맞춰 가기 위해 애를 쓰고도

너무 익숙해졌다는 이유로 끝이 난다."


익숙해지기 위해 애쓰다가 익숙해져서 끝이 난다는 글은 오래된 연인이 연상 되었다.

조카도 사귀던 남자와 헤어질 때 만나도 설레임이 없고 밥만 먹고 영화 보고 카페 가고 헤어지는 연애가 어느 날부터 너무 지루하더라고 했다. 그래서 헤어졌다고. 연애 기간이 길어지는 연인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 특징이지만 그렇게 익숙해져서 편안해진 그 노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


5년 연애한 첫 여자 친구와 결혼을 결심한 아들에게 다른 여자도 만나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냐고 넌지시 물어보자

 "그 힘든 일을 왜 또 해. 이제야 익숙해져서 편해졌는데."

라는 답이 돌아왔다. 현명한 선택이라고 여겼다.


사랑은 감정이기도 하지만 책임감이 더해져야 한다. 끝까지 변치 않는 사랑이어야 한다는 확신을 할 수는 없지만 서로에 대한 책임과 믿음. 측은지심으로도 살다보면 뜨거운 것만 사랑이 아님을 깨닫는다.


사랑을 해보기 전까진 사랑을 막연히 동경한다. 짝사랑. 첫사랑도 느껴보고 영화 같은 아름다운 사랑이 내게도 올 거라고 기대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사랑을 하긴 어렵다. 관심이 가던 사람과 마음이 통해 만나보니 설레였고 연애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결혼까지 하게 됐다. 살면서 연애할 땐 몰랐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될 때면 서로 속았다며 우스갯소리를 하며 다른 부분을 조금씩 맞춰 가며 혼자가 아닌 둘이 헤쳐 나가는 것이 사랑이다. 무엇보다 이상이 아닌 현실이다.


결혼이란 굴레에서 해야 할 일이 늘고 아이를 낳고 가족이 생기니 이젠 더 이상 혼자가 아닌 오롯이 함께였다. 책임감이 늘고 희생하고 인내하며 참아야 할 일도 생겼다. 그러면서 진짜 어른이 되고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서서히 깨닫는다.


받는 사랑이 아닌 주는 사랑. 아낌없이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 나란히 함께 걷는 편안한 사랑. 익숙하고 친밀한 사랑.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사랑. 늘 같은 자리에 있는 바위 같이 우직한 사랑. 편안하게 기대는 쉼터 같은 사랑. 소소한 것을 함께 누리며 기뻐하는 사랑 등이 30년 살면서 내가 느낀 사랑의 의미이다.


에세이는 삶을 조명한다. 글 쓴답시며 바쁘다고, 할 일 많다고, 시간 없다고 미루다가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갖고 책을 읽으니 새로운 감정과 여운이 밀려왔다. 좋은 글을 많이 읽어야 격조 높은 글도 나오는 법인데 그동안 책과 너무 멀리 했다. 책과 시간을 보낸 하루는 감정을 정화시키고 정진하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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