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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j Aug 26. 2024

최악의 날


중학교 때 국사를 가르쳤던 선생님의 별명은 마귀할멈이었다. 나이가 좀 드신데다 학생들에게 거침없는 체벌을 가하던 무서운 선생님이었기 때문이다. 중 1때였을 것이다. 비교적 모범생에 성적도 상위권이던 난 국사 선생님  눈밖에 날 일이 전혀 없었다. 성적도 좋았고 숙제도 꼬박꼬박 해서 오히려 선생님의 신임을 받은 나였다.


 하지만 그 날 한 사건으로 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그 뒤부터 국사 과목까지 싫어지게 만들었다.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선생님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볼 수가 없을 만큼 치가 떨렸다.


옆 반 친한 친구가 국사 노트를 두고 왔다며 빌리러 왔다. 교과서와 노트 검사를 항상 하는 선생님이어서 무서운 선생님한테 걸리면 어떤 결과가 초래할지 알기에 선뜻 빌려주었다. 수업이 끝나서 노트를 돌려받고 우리 수업도 끝나고 숙제와 노트 검사를 하기 위해 줄을 섰다. 내 노트 검사를 하며 노트를 덮는 순간 견출지로 친구의 이름이 써있는 것을 보고 난 너무나 놀랐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고 선생님의 눈빛은 벌써 차갑게 변했다. 여느 때 선생님 같았으면 그 자리에서 매가 날라왔을 텐데 교무실로 오라는 말을 남기고 가셨다. 그나마 나를 아시기에 관대한 처사였다.


평소에 수업 시간에 질문을 하고 답을 못하는 친구들에게 기분에 따라서 어느 때는 나오라고 해서 회초리로 때리고 한 친구는 가슴을 푹푹 찌르면서 외모 비하 발언까지 거침없이 하던 잔혹한 선생님이었다. 인격적으로나 수업의 질이나 선생님으로서 자질이 전혀 없어 학생들 사이에서 악질 선생님으로 통했다.


그런 선생님께 책을 잡혔으니 걱정이 가득했고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찾아온 친구는 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어서 미안하다며 쩔쩔 맸다. 견출지를 떼었거나 나한테 미리 말을 했어야지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한 친구가 원망스럽긴 했다. 어차피 일어난 일이니 후회한들 소용 없어 괜찮다고 말했지만 친구까지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상황을 설명하려면 친구도 같이 교무실에 가야 했기 때문에 수업을 끝내고 종례를 마친 뒤에 친구와 둘이 교무실로 갔다. 선생님 앞에 선 우리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잘못 했다고 용서를 구했다. 조용한 목소리로 알았다고 가라고 했지만 바로 갈 수가 없었다. 자리를 뜨시길래 진짜로 그냥 가라고 하나보다 하고 노트를 들고 교실로 왔다. 걱정하며 기다려준 친구들과 같이 얘기를 하고 있을 때 씩씩대며 내려오신 선생님이 책상 위에 있는 내 노트를 들고는 내 얼굴을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누가 노트를 갖고 가랬냐고 큰 소리를 치면서 한참을 화풀이를 하시더니 나가셨다. 얼굴이 얼얼했다. 그렇게 잘못한 일인지 너무 억울해서 펑펑 울고 친구들은 걱정과 위로로 어쩔줄 몰랐다. 부모님께 뺨 한 번 맞아본 적이 없었는데. 한참동안 진정이 안됐다. 실컷 울고 났어도 수치심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연신 미안해 하는 친구에겐 네 잘못이 아니라며 서로 위로했다.


겨우 진정을 하고 교실에 나와서 집으로 가려는데 산지 얼마 안된 새 운동화까지 사라져 버렸다. 진짜 어이없고 황당했다. 하필 그 날... 그 당시 나이키. 프로스펙스 등의 운동화가 한참 인기 있을 때 파란색 운동화에 흰색 로고가 있는 프로스펙스를 졸라서 산지 얼마 안 된 운동화였다. 좋은 운동화를 가끔 잃어버리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늦게까지 교실에 남아있다 보니 누군가 운동화를 훔쳐간 것이다. 실래화를 신고 터덜터덜 집으로 가는데 비참하고 서럽고 억울해 눈물을 흘리는 나를 그냥 보낼 수 없던 친구들이 집에까지 데려다주었다. 난 다음 날 학교에 어떻게 가나 울면서 잠이 들었다.

 

뻔뻔스럽게도 다음 국사 시간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내 노트를 돌려주셨고 기말 시험을 보고 성적이 좋았던 내 손까지 잡으며 칭찬하셨다. 소름이 돋았다. 학생에게 상처주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는 선생님이 싫어 국사과목까지 싫어졌다. 무작정 필기하고 외우게 시키게만 했던 선생님의 교육방식도 싫어 국사에 대한 흥미는 점점 더 사라졌다. 억지로 한 공부는 겨우 시험 점수 외에 아무 의미도 남기지 못한채 시험만 끝나면 단기 기억으로 금방 사라졌다.


나중에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다시 공부했을 때 새로웠다. 따로 따로 알던 역사의 흐름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흥미를 가지면서 공부했을 때 그 때의 기억이 또렷이 떠올랐다.


지금도 학창 시절 그 선생님을 생각하면 학생들의 인권 보호를 위해 체벌을 금지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그 당시 불량했던 남학생들이 학생부로 불려가면 대걸레 손잡이가 부러질 정도로 맞고 나와도 선생님께 이의 한 번 제기하는 부모님이 없을만큼 교권은 중시됐다. 학생들의 지도는 선생님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다. 선생님들의 지위가 너무 낮아져 오히려 자존감이 낮아지고 교사로서 사명감과 열정을 사라지게 만드는 지금의 안타까운 상황과 너무 비교되던 시절이다.


학생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그 분은 내 마음 속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선생님으로 평생 자리잡았다. 학생들과 친밀하게 지내면서 수업에 흥미를 갖게 만들고 학생들의 재능을 끌어주며 자신감을 갖게 하며 얼마든지 존경받는 선생님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박차버린 그 분은 선생님으로서 자질부터 배우셔야 했다.


그 날 이래저래 여린 청소년기였던 나에겐 최악의 날이었고 지금도 그 기억은 생생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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