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끄적거린 "안녕" 이란 시였다. 얼마 전 수필집을 읽다보니 채민성 작가님이 쓴 "안녕의 온도" 란 글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쓴 안녕이란 시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 반가웠다.
"안녕의 얼굴을 안다. 만남에게는 반가움의 온도를, 떠남에게는 제법 아쉬운 온도를 남기는 말.
우리는 안녕으로 사람을 만나고 안녕으로 떠난다. 기억은 온도의 잔상이 되어 쉽게 잊히지 않는다. 오랫동안 마음의 곁에서 머문다. 그 뜨거움을 알아서 다시 사람을 찾고 여행을 떠난다. 아쉬움을 알기에 순간에 충실하는 태도를 배운다. 어떤 온도의 안녕이었던 간에 떠남의 안녕은 여운이 되어 평생을 머문다.
안녕이란 말이 그렇다."
안녕을 온도로 표현한 작가님의 멋진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반가움의 온도. 아쉬움의 온도는 내가 쓴 친근함. 반가움. 그리움을 연상시켰다. 그런 감정을 온도로 표현한다면 누군가에겐 뜨겁기도 하고 차갑기도 하고 미지근한 온도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관계에 따라 다른 것이 안녕이란 온도이다. 가족 같은 끈끈한 관계는 안녕의 온도속에 건강과 안위에 대한 더 깊은 바람이 담겨있을 테고, 친구나 형제 같은 친밀한 관계는 오랫동안 마음에서 머물게 되고, 지인이나 알고 지내는 이웃들과는 가벼운 안녕으로 지나간다.
또한 안녕의 온도는 나이가 들수록 무겁게 다가온다. 부모님과의 안녕의 순간 이별이 찾아올 때 잘 견뎌내는 준비가 필요하다. 두 아버님을 보냈을 때 그러했고, 이제 80세 중반이 되신 두 어머님과도 언젠가는 찾아올 안녕이 두렵지만 견뎌야 한다.
밤새 안녕이라고 했던가. 안타까운 안녕을 했더라도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는 이들을 많이 만났다. 딸을 먼저 보낸 권사님도, 엄마를 먼저 보낸 친구 딸도, 사랑하는 이들을 먼저 보낸 이들도, 일찍 부모를 여의고 남은 자식들도 작가님 말처럼 평생 여운이 되어 마음속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