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미경 Jun 18. 2024

멱 감는 여인들

깊고 푸른 밤 노천탕에 경운기 나타났다

깊고 푸른 밤, 멱 감는 여인들

방천 너머 괴이한 그림자 점점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게 섰거라, 여기가 어디라고, 이 야심한 밤에 금남의 노천탕을 기웃거리느냐"

조신한 여인들, 자지러지게 소리쳤다


깊고 푸른 밤, 멱 감는 여인들

털털 탈탈 소리만 켜둔 체 꼼짝달싹 하지 않는 경운기에 옆에 있지도 않은 엄마를 허겁지겁 불렸다

"엄마야 엄마야, 이리로 올 건가 봐, 엄마야 엄마야, 우짜면 좋노!"

맨살의 여인들, 돌바닥에 살포시 올려놓은 옷, 주섬주섬 집어 들어 허둥지둥 앞가림을 하였다


깊고 푸른 밤, 멱 감는 여인들

눈을 불끈 감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암말 않고 지나가는 경운기에 욕태배기 날렸다

"일찍 일찍 다니던가 안 하고, 이 뭐 하는 짓이고, 일부러 그런 거라면 니 무사치 못할 끼다" 

하늘하늘 물잠수복 차려입은 여인들, 까만 머리 참방참방 동동 동동 띄웠다



내 고향 여름은 푸른 강물에 멱 감는 계절이었다.

낮에는 밭일 논일로 비지땀을 흘리고

저녁에 시원한 콩국수 한 그릇 말아먹고

어슴푸레한 밤이 되면 후레시를 들고 강마실을 나셨다.

헐렁한 옷 한 벌 챙겨 들고

남자들은 윗 보담에서

여자들은 아래 새 보담에서 낮에 묻힌 짙은 풀물, 흙물을 털어내었다.


남자 여자, 여자 남자 절대 선을 넘지 않았다.

남녀 1세 부동석 규율이 엄격하게 지켜지던 노천탕이었다.

100여 미터 거리를 사이에 두고, 온유한 달빛 아래 살랑살랑 강물에 몸을 띄웠다.


찰랑찰랑 강물에 가만히 누워 있어도 푸른 때, 누런 때가 말끔히 씻겨 나갔다.

목만 빠꼼 내놓은 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청렴결백한 물의 기운, 창대한 하늘의 기운을 채웠다.

화동 반딧불이 길 밝히는 강둑길을 꿈길같이 거닐었었다.


한낮의 끈적끈적한 피부 반들반들 빛나고

대낮의 후텁지근한 피부 산뜻산뜻 청초하고

방천 바람에 머리를 말리며 깊고 푸른 여름밤 단잠을 이루었었다.



여름이 절정으로 치닫던 깊고 푸른 밤,

놀러 온 고종사촌 언니에게 우리 동네 좋은 문화 체험시켜 준다고 새 보담으로 행차하였었다.

가는 장이 장날이라 카더만 

노천탕, 마을의 크고 작은 여인네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자리가 어디 나겠노?' 두리번두리번 

더듬더듬, 돌다리를 두드리고 있었더니만

앞집 아지매, 컴컴한 밤에 더 뽀얀 내 얼굴 단박에 알아보고 반갑게 부르셨다.


"미경아, 여 온나, 우리 다 했다"

     "아지매, 일찍 나오셨네예"

"하도 더버가, 오늘 쪼매 빨리 나왔다"


이웃사촌 자리를 셈도 치르지 않고 공짜로 양도받아 세숫대야 짐을 풀었다.


"우! 우! 우!, 언니야 어때?"

    "어! 시원해! 시원하다!, 외갓집은 이런 곳이 있어 참 좋다!"


폭 1미터도 되지 않는 새 보담에 가로 정렬하여, 팔팔 끓어 오른 대낮의 열기를 식히고 있었다.

바글바글 노천탕의 어린 여인들, 팔딱팔딱 개구리헤엄 세상 넉넉하게 즐기고 있었다.

사촌언니, 몸속 깊이 파고드는 시원함에 치조골을 달달 떨었었다.



이때까지 VIP를 모시고 진행된 문화체험행사 순조롭게 진행되었었다.

초대받은 손님의 함박 미소에 행사 주최자 어깨가 들썩였었다.

'우리 마을 좋은 문화' 자부심이 하늘로 승천하고 있었다.


'쾅' 

깊고 푸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별안간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오는 희미한 경운기 소리, 털털 탈탈.

'이럴 일이 없는데'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이게 무슨 소리고?"

"설마 이리로 오기야 하겠나?"

느닷없이 나타난 미확인 물체에 촉각을 곤두세운 경호원들, 정체를 파악하느라 동분서주했다.


그것이 점점점점 더 크게, 더 가까이 들리는 게 아닌가?

설마, 설마 하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 카더만

재빨리 강둑을 기어오른 어린 경호원들,

경운기 노천탕으로 오는 게 확실해 보인단다.

멱 감던 여인들, 

엄마야, 엄마야를 부르며 난리 부르스를 췄다.


"게 섰거라"

목청 좋은 경호 대장 여인, 경운기를 멈춰 세웠다. 

시간의 틈이 생긴 사이

탕에서 나간 여인네들 네팔 내팔, 네발 내발 허둥지둥 옷을 둘러쳤다.

탕 안에 있는 여인네들, 하늘하늘 물잠수복 차려입고 머리만 띄운 체 깊이 잠수하였다.


"그 빨리 지나가라"

경호 대장 여인 한 번 더 소리쳤다.

경운기, 서슬 퍼런 노천탕 금을 찌익 밟고 들어섰다.

시뻘건 외눈박이 왕눈을 불끈 감은 채, 밀짚모자 푹 내려쓴 채,

욕태배기 얻어먹으며 최대 속력 올려 강 건너로 새빠지게 날아갔다.



손님 모셔 놓고 

전대미문 예측불허 일로 난처했던 깊고 푸른 밤,

옆에 있지도 않은 고모를 부르던 사촌 언니, 

아닌 밤중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받고도 그래도 좋았단다.


금남의 노천탕 어마무시한 금을 밟고 석고대죄한 이, 

"그래서 누고?, 눈데?, 누구라꼬?"

멱 감는 여인들의 전후무후한 욕태배기 날림 행사 유치하여, 

깊고 푸른 밤 혼자서만 뻘게진 얼굴로 무안 극치를 무한히 달리신 분은

강 건너 모래밭에 사시는 우리 일가 아재였다.


아재, 하짓날 긴 긴 해를 믿고 눈코 뜰 새 없이 일을 하다 밤이 깊어진 줄도 모르셨단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다 하지만 

아재, 고의로 그러실 분은 절대 아니시다.

굳이 죄를 물으신다면 억척스러운 근면 성실, 고집스러운 순박함에 재갈을 물리지어다.



전깃불 차례차례 밝아지고 버스 왕래 잦아지자 노천탕에 위기가 찾아왔다.

노천탕에서 멱 감는 문화 소식, 버스에 앉아 전깃줄을 타고 사방팔방 퍼져나갔다.

이웃 동네 사람들, 

이색 문화 노천탕이 궁금했던 모양인지 야심한 밤을 타고 몰래몰래 탐방을 오기 시작했다.

깊고 푸른 여름밤이 되면 우리 마을에 낯 선 그림자가 하나 둘 얼른거렸다.


한여름 초입 

열받은 여인들, 하루 먼저 멱 감으러 나갔다가 봉변을 당할 뻔한 일이 벌어졌다.

아랫동네 음흉한 청년들, 노천탕 소문 듣고 강줄기를 타고 올라와 멱 감는 여인네들을 훔쳐보았다.

때마침 들일 마치고 늦게 들어오시던 어르신께 발각되어

멱 감던 여인들 화를 면하였다만,

그 일이 있고 나서, 동네 아낙네들 더 이상 노천탕으로 나가지 않았다.


밥숟가락 놓기 바쁘게 잠에 곯아떨어지는 농사일에 불침범을 설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여

이장님, 마을 치안유지를 위하여 여인네들 노천탕 영구휴업한다는 방송을 하셨다.


지조 있는 여인들,

아무리 열이 뻗쳐도

우물가 한옆에 쓰개치마 둘러치고 앉아 옹졸한 등목을 하였다.

촐싹 촐싹 훌쩍훌쩍 박바가지 물을 끼얹었다.


'아! 옛날이여!' 촐싹 촐싹

'아! 강물이여!' 훌쩍훌쩍

'아! 새 보담이여!' 그때 참 시원하니 좋았는데!









작가의 이전글 닿을락 말락 홍시 따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