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함을 즐기지 못하는 이유.

EP 3. 세계여행의 첫 시작점. 발리(2) - 길리섬

by 모두의 신대리


세개의 섬 길리 트랑완안, 길리 메노, 길리 아이르로 이루어진 길리 군도.


세계여행의 첫 시작점. 기념비적인 나의 첫 여행지를 발리의 작은 섬 <길리 트랑왕안>으로 정했습니다.


길리섬 세개를 합쳐도 인구가 약 천 1500명밖에 되지 않는 가로 3km 넓이 2km에 불과한 이 곳.

자전거를 타고 섬 한바퀴를 돌아보는 데 한시간이면 충분한 이 섬에서 나는 세계여행의 첫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길리섬이 개간되기 전, 섬의 원주민이었다는 고양이들. 별칭으로 고양이의 섬으로 불릴만큼 길리엔 고양이들이 가득하다.


일주일 간의 길리에서의 생활은 단순했습니다.


(회사를 다닐 땐 알람 없인 절대로 일어날 수 없었던) 아침 7시에 눈을 떠 1박에 8천원짜리 호스텔에서 준비해준 조식을 먹고, 해가 너무 뜨거워지기 전에 느긋한 거북이들이 유영하는 숙소 앞 스노쿨링 포인트에서 수영을 합니다.


눈부실정도로 밝은 푸른 빛의, 소금보다 짜디짠 물 밖으로 나와 읽고 싶었던 책들을 조금 읽어주고, 단어 그대로 쪼록쪼록 흐르는 약한 물발의 찬 물 (강경 쪄죽어도 따뜻한 샤워 파로썬 아주 힘든 일이었습니다..) 밖에 나오지 않는 숙소로 돌아가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가능한 천천히 샤워를 하구요.


이 후 다시 간단히 짐을 챙기고 하루에 2500원을 주고 대여한, 약간은 균형이 맞지 않는 화려한 색상의 자전거를 타고 나가 맘에 드는 식당을 골라 점심을 먹은 후, 산책 겸 가볍게 해가 지는 섬을 한바퀴 둘러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녁 일곱시. 해가 지면 숙소 반대편 해변가에 있는 리조트에서 무료 영화를 보고 맥주를 한잔 마셔줍니다.


매일매일 다르게 틀어주던 리조트의 무료 영화. 3일 연속 방문해 음식을 먹은 걸 보니 아주 훌륭한 마케팅이 틀림없다!


일주일 간의 첫 나홀로 여행은 이런 단순함으로 채워졌습니다.


넘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평소엔 잘 하지도 않았던 이런 저런 철학적인 생각들과 함께한 느리게 흘러가는 일주일.


사실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다. 느릿한 길리 생활을 함께해준 고마운 홈스테이 집주인 (일함)


하지만 의외로 정신없고, 속상하고, 긴장되고, 짜증나고, 속이 시끄러웠던 몇년 간의 회사 생활 내내 한참을 막연히 꿈꿨던 평화로운 섬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그렇게 충만하진 않았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해보자면 생활이 충만하지 않았다기 보단, 당황스러웠다는 것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매일매일 바쁘게 살아온 현대인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다는 것. 그 것 자체가 하나의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의 나는 몰랐기 때문입니다.


사실 길리 트랑왕안섬은 파티 아일랜드로도 유명한데, 약간 낡고 지친 나는 파티와는 거리가 있다. 나의 최대의 파티였던 맥주 먹기….


그럭저럭 즐거웠던 여행 삼일째가 지났을 때 부터 어느 순간 이 작고도 작은 섬에서 내가 하지 못한, 즐길 수 있는 콘텐츠 거리가 뭐가 있을 지를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스노쿨링과 수영은 이미 충분히 즐겼는데.. 무료 영화도 봤고.. 딱히 쇼핑을 할 곳도 없고 뭔가 보러 갈 사원도없네. 아직 길리에서의 생활이 3일이나 더 남았는데 이제 뭘 해야하지?

나는 눈이 부시게 빛나는 바다를 눈앞에 두고 손바닥 만한 핸드폰을 코앞에 댄 채 블로그와 포털 사이트를 뒤지며 할 것을 찾고 또 찾았습니다.


퇴사를 하고 여행을 떠나면 막연히 행복만 할 것이라는 상상과는 다르게 나는 나에게 주어진 자유로움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생산적이지 못한 건 옳지 않다는, 누구보다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나름 열심히 꾸려왔던 평범한 반도의 한국인에게 급작스럽게 들이닥친 여유로움은, 기쁨보다는 오히려 어려운 숙제 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아무 문제 없다고? 시간은 금이라 하지 않았나?


여행을 떠나오기 전 끊임없이 나를 괴롭혀온 걱정들이 또 다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이 적지 않은 삼십대 초반에 나이에, 업무도, 결혼도, 아이도.. 무엇 하나 하지않고 저 멀리 앞서 발빠르게 뛰어나가고 있는 남들 사이에서 나홀로 멈춰서서. 딱히 필수적이지도 않은 이런 여유를 이렇게 오래 즐겨도 괜찮은걸까?


누구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마음 속에서 만들어낸 스스로의 괴로움과 싸웠습니다.


나에게 내리쬐는 햇빛이 뜨거울수록, 바닷 속 풍경이 아름다울수록, 내가 만든 괴로움은 점점 커져 나를 괴롭혔습니다.


그 때, 물밀 듯 가득 채우는 어두운 생각들을 떨쳐 내기 위해 뭐라도 생산적인 일을 하자는 부채감에 꺼내 읽은 헤르만 헤세의 책 <삶을 견디는 기쁨>이. 나에게 대답을 주었습니다.


분주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오히려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의 기쁨을 방해하는 가장 위험한 적이다.

그저 우리의 목표는 ‘가능한 많이, 가능한 빠르게’가 되었다. 그 결과 쾌락은 점점 더 많아졌지만 즐거움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도시에서 벌어지는 축제에 참가하거나 놀이공원이라도 찾아간 사람은 뜨거운 열기에 몸은 달아오르고,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뻑뻑해진 눈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게 되고, 온통 힘든 기억들만 머릿속에 간직하게 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런 잘못된 삶의 방식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다만, 별로 현대적인 모습으로 현대적인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는 내가 오래전부터 마음 속에 품어 왔던 생각 하나를 말하고 싶다.

적당한 쾌락을 즐기는 것이야 말로 삶이 주는 맛을 이중으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느끼는 사소한 기쁨을 간과하지 말라는 것이다.


혼자여야 알게 되는 것이 있다고, 천천히 해야 깨닫는 것이 있다고, 쉬어가야 보이는 것이 있다고. 헤르만 헤세가 나의 고민에 대답 했습니다.


수많은 바쁜 일상을 이겨내기 위해 어느샌가 나는 쉽고 빠른 자극적인 쾌락과 기쁨에 중독되었나봅니다. 가능한 많이, 가능한 빠르게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도록.


지금은 너무나 서툴지만 평범한 일상해서 누리지 못했던 느리게를 즐기는 방법을 배워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멈춰선 것이 아니라, 느긋함을 즐기는 방법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여유로움 끝판왕. 길리에서의 일주일.



***


길리를 추억하게 해주는 특별한 기억 세가지.


정류장 택시처럼 대기하던 마차들
1. 운송수단.

환경 보호를 위해 차와 오토바이가 없다. 말과 자전거로만 이동할 수 있는 것이 매력 포인트



길리 도착 첫 날 만난 거북이. 스토커처럼 쫓아다녔다.
2. 거북이

앞바다 어디에서도 만나볼 수 있던 거북이들. 해초를 뜯는 야생 거북이를 코앞에서 만나볼 수 있던 순간.


3. 사람들

어디서나 친근하게 대해준, 친절하고 다양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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